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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원목사 손동희권사 다니엘기도회 본문

다니엘기도회/기업대표 실업인 다니엘기도회 간증

손양원목사 손동희권사 다니엘기도회

generalQS 2024. 2. 4.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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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함께 기도드리겠습니다.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부족한 것이 이 자리에 나와서 지난날에 파란 많았던 시절에 대해서 증언을 하게 됨을 진 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 시간을 통하여 먼저 우리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여 주시옵시고, 이 간증을 듣는 저희들 은 한우는 은혜를 받는 귀한 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세상은 잠깐 지나가는 낙은의 세 상입니다.
우리는 이 땅의 자랑과 정욕을 구하지 말고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살아가는 저희들 되 게 하여 주시옵소서.
앞서 가신 순교자들은 환란을 당했을 때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저희들도 그러한 믿음을 배우는 이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제가 지금 간증을 시작하려고 하오니 이곳에는 마귀가 틈 못하게 하여 주시옵 시고
오로지 성령만이 함께하는 이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모든 마음속의 각자의 마음속 에 성령만이 임하게 하여 주시옵심을 간절히 원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마실 때까지 한 사람도 그저 왔다. 그저 돌아가는 이가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이름 받들어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조금 전에 목사님이 읽었던 마태복음 10장 37절에서 39절까지 말씀은 저희 아버님이 일 제시대 신사참배 반대로 일경에 끌려 감옥으로 들어가실 때 저희 할아버님이 마지막으로 주신 이 성경 구절이 바로 지금 오늘 읽었던 마태복음 10장 37절에서 39절까지 말씀입니다.
제가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 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함이, 또 자기 십자가를 지 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자는 잃을 것이오,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원래 제 간증 시간은 1시간 반입니다. 그런데 오늘 짧게 해야 되겠네요.
시간 반을 줄여야 되겠어요. 지금 시간이 11시 차를 예매를 했거든요.
오늘 밤에 또 내려가야 하기 때문에 그리 길게 하면 안 된다고 아까 목사님이 그러시더라고 짧게 하라고 그래서 제가 오늘 짧게 해야 되겠는데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혀가 빨리빨리 돌아가야 된대 좀 빨리 말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손양원 목사를 향한 대역사를 이루신 것은 애양원이라 하는 곳에서부터 시작이 됐습니다.
애양원 여러분 다 잘 아시죠? 지금 전라도 여수와 순천 사이에 자리를 잡는데 그때 그곳에는 애양원에는 나환자촌이에요.
나환자촌인데 그때 나병 환자 숫자가 한 천여 명이 넘었어요.
이들은 참 인간이 소외되고 갈 데 올 데 없어 찾아온 것이 바로 이 영혼입니다.
이 한센병 환자들은요. 요즘 그런 나환자들을 찾아볼 수가 없죠.

그 당시에는 왜 나환자들이 그리 많았는지 그 애양원 안에 14호실 같은 데 문을 딱 열어볼 것 같으면 사람들이 깜짝 놀라요.
이게 사람인지 무슨 괴물인지 너무너무 끔찍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어요.
지금도 역사관에 가면 전부 그 사진들이 있는 거 보면 놀랄 정도였습니다.
아버님이 이들을 너무 사랑을 했습니다. 이들을 위해서 쓰신 기도 시가 있습니다.
아버님이 기도시를 길게 썼지만 제가 시간상 앞에 머리만 조금 읽어드릴게요.

주님 나는 이들을 사랑하되 내 부모, 형제 처자보다 더 사랑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들은 세상에서 버림당한 자들이 없고 부모 형제 사랑에서 떠난 자들이 없고, 세상 모든 인 간들이 다 싫어하여 꺼리는 자들이오나 그래도 나는 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하여 주옵소서 만일 내 몸이 저들과 같이 추한 지경에 빠질지라도 사랑하게 하여 주옵소서
만약 저들이 나를 싫어하여 나를 배반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저들을 사랑하여 종말까지 싫어 버리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만일 내가 여기서 쫓겨남을 당하여 나가게 될지라도 나는 이들을 사랑하여 쫓겨난 그대로 남은 세월을 이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는 참다운 사랑을 나에게 주 옵소서

이것이 아버님이 그 당시에 낳은 자들을 위한 심정이었습니다.
이렇게 이제 세월이 흘러가면서 참 나환자들과 아버님 사이에는 정말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사랑으로 계속 이어져 갔습니다.
그때부터 애원한 평화가 찾아오고 찬송 소리, 기도 소리 끊기지 않는 참 행복한 나날들이 이 어졌는데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1940년 9월 25일 이날 밤에 느닷없이 일본 형사 두 사람이 나타나더니 아버지는 손에 수갑을 채가지고 끌고 가버렸습니다.
아버님이 끌려온 제목이 뭔가 하면요 신사 참배 반대였습니다.
여러분 신사 참배 문제 다 아시죠? 일제시대의 신사 참배가 뭔가 하면요 이 천황을 우상화하 는
일종의 망동으로서 신사 참배에 반대하는 자는 천황 신성 모독죄로 적용을 시켜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절대 신으로 아는 것만큼 일본 역시 이 천황을 절대 신으로 알고 있었기 때 문에 이 두 사이의 알력이란 극에 달했습니다.
해방될 때까지 법에 걷던 하나님의 아들들이 2천 명이나 끌려서 감옥으로 들어가서 가장 고초 를 당했습니다.
교회가 문을 닫았고, 아버님이 다녔던 평양신학교도 폐교됐습니다.
50명의 순교자들도 생겨났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제10계명 볼 것 같으면 나 외에 다른 신을 내게 두지 말라.
절하지도 말라.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아버님은 끌려서 감옥으로 들어갔죠. 애양원은 지금 어떻게 돼 있습니까?
목자는 양떼가 돼가지고 있는 환자들이 허둥지둥 갈피를 못 잡고 있을 때
일본 사람 한 사람이 들어왔는데 이름이 안도라고 합니다.
안도 안도가 소위 원장으로 들어왔는데 안또 원장은 악랄하기 짝이 없어가지고 애양원에 들어오자말라
지금애양원에도 신사참배바람이 불어가지고, 만일에 신사참배안할놈들은 애양원에서 나가라고 소리칩니다.

그때 이 나 혼자 그러한 모습을 가지고 어디로 나가겠습니까?
나가서 구걸생활 하겠습니까? 그래도 자기들의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 나환자들 7~8명 이 애양원을 뛰쳐나왔습니다.
뛰쳐나와가지고 어디로 갔냐 하면 저 하동군 옥종용 북방리 산속에 움막 쳐놓고 이 움막 속에 서 바가지 들고 이 집 저 집이 구걸 하면서 생활하는 나환자들도 생겨났습니다.
그러고 자기들이 신앙의 절개를 지켜갔죠.
이제 아버님이 끌려가고 안 계시니까 우리 보고도 안도 애양원 원장이 이제 사택 비우라고 독 촉합니다.
우리도 그만 그동안에 정들었던 애양원을 울며 쫓겨나왔습니다.
애양원으로 쫓겨나온 우리는 어디로 이사하러 갔냐면 지금 부산입니다.
부산 범내골이라는 곳이 있지 범내골 산꼭대기에 이사를 갔습니다.
산꼭대기 저 높은 데로 이사를 갔습니다. 이제 아버님이 안 계시니까 우리 그때 일곱 식구였 습니다.
일곱 식구도 먹고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때 우리 두 오빠가 있었는데 우리 큰오빠 나이는 18살이었고, 우리 작은 오빠 나이는 13살이었습니다.
우리 두 오빠가 간신히 간신히 찾아낸 곳이 이 통공장 나무통 만드는 나무 조각조각 태를 둘 러서 요즘 그런 거 없어요.
그 만드는 통공장이 있었습니다. 그 통공장에 두 오빠가 취직해서 밤늦게까지 일을 해야 하고 우리 어머님은 산으로 둘러다니면서 쑥이며 나물 캐러 다녀오셨습니다.
이래 저희들은 참 바깥에서 힘들어하고 아버님은 아버님들이 지금 감옥에서 온갖 고생하고 계 십니다.
그래서 우리 아버님이 감옥에서 저희들이 이렇게 힘들어할 때만 가끔 저희들에게 편지를 보내 는데 그때 이 편지를 내가 하나 적어봤습니다.
이 편지는 우리 큰오빠가 그때 우리 일곱 식구의 소년 가장이었거든요.
그래서 우리 큰오빠에게 쓴 편지입니다. 아버님이 쓰셨습니다.

사랑하는 동인에게 동인아 아버지를 생각하며 눈물로써 쓴 너의 편지 또한 감격의 눈물로서 애도하였다.
아버지를 대신하여 위로 할아버님, 어머님 아래로 동생들을 거느리고, 가정의 중간 책임의 연약한 어깨는 얼마나 무거우냐 나의 간절한 부탁은 할아버지를 잘 위로하여 아버지가 못한 일을 너는 잘할 줄 안다. 먹고 입는 것이 귀해졌다 하여 마음까지 잃지 않아야 하고, 음식 을 잘 먹는 것보다 마음을 잘 먹는 것이 더 낫고, 좋은 의복으로 몸을 단장하는 것보다 선 행을 옷 입듯 할지니라.
돈없어 설움 당하고 먹을 것이 없다 하여 돈과 밥을 더 가까이 할 것이 아니라 더욱더 청념 을 따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태도니라.
평상시에는 누가 기뻐 안 하겠나 고난 중에 기뻐함이 신앙생활이다.
고난을 피하려고 하지 말고 도리어 감수하고 극복하라.
피하려고 애쓰는 자는 근심이 더해지고, 감수하는 자는 진리를 발견하여 기쁨이 충만해지나 니, 고난을 감수하니 심중이 낙원이고, 만사를 극복하니 용사보다 더 강하구나.
지식에 대하여는 비록 학교에 안 다녀도 얼마든지 배울 수 있느니라.
세계의 대부흥사 무디 선생도 공장 직공이었고, 웅덩이에 내내버린 요셉이 애굽의 총리 대 신이 될 줄이야 누가 알았으며, 나일 강물을 갈대 밭에 내다버린 모세가 이스라엘의 구원자 가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느냐.
나무통 만드는 통 공장에 다니는 우리 동인이 동신이의 장래도 어떻게 될지 그 누가 알겠느 냐.
그러므로 항상 근신하고 노력하여 학식과 덕행에 힘쓰도록 하여라.
또한 죄를 범하지 말라. 사람의 죄를 범하면 죄의 종이 되어 일생을 고통으로 살게 되느니 라.
나는 무엇보다 너희들이 행여나 죄를 범할까 봐 늘 가슴에 염려된다.행여나 마귀의 세력에 유혹될까 아버지는 늘 생각하지 않을 수 없거나, 나는 지금은 이와 같이 수금 중에 있어도 어릴 때부터 주의하지 않았던 습관과 죄악과 싸우고 있다. 행여나 내 죄가 너희들에게까지 미칠까? 주께 간절히 빈다. 죄는 공허 사망이니라 싸우지 않으면 승리가 없고, 이기지 못한 자는 면류관도 없나니, 힘쓰는 자는 주께서 도와 승리하게 하신다.

우리 할아버지 계셨는데요. 참 우리 할아버님 아버지한테서 편지 먹으면 얼마나 많이 우신지 몰라요.
우리 할아버님은 아버님 감옥에서 편지 올 때쯤 되 되면은 그 기간을 어떻게 용케 알고 계시 더라고요.
그래가지고 돌담 밑에 내려가 가지고 우체부 아저씨 오시기를 기다리다가 아저씨가 편지를 건 네주면 큰 이 편지를 움켜쥐고는 청천걸음으로 들어오십니다.
우리 양원아, 우리 양원아 하시면서 부들부들 떨어요.
우리 할아버님은 다 읽으신 이후에는 우리 할아버지 두 다리 뻗어놓고 영원한 영원한 불쌍한 내 아들이라고는 얼마나 손에 쥐면서 우신지 몰라요.
우리 아버님은 효자 중에 효자.
그래서 우리 아버님이 할아버님께 쓰신 편지 한 구절만 더 읽어드릴게요.

아버님 전상서, 아버님 불효자 영혼을 위하여 조금도 염려하지 마옵소서.
한 덩어리의 주먹밥, 한 잔의 소금국. 그 진미는 그야말로 천사의 떡 맛이올시다.
아버님은 엄동설한 추위를 염려하시나 들의 백화화를 곱게 키우시고 공중의 새를 먹이시는 우 리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이요 일하는 일꾼 밥 아니 먹이겠습니까?
소자는 본래 양이 적은 사람이니 이 밥도 만족하옵고, 또 키가 적은 사람이오니 이 적은 이불 이 내 발등을 덮었으니 이만하면 만족이오이다.
밤이 지나면 낮이 오고, 추운 겨울이 지나면 따뜻한 봄이 오는 것이오니 광명한 낮을 맞이하 기 위하여 어두운 밤을 겪지 않을 수 없고, 양춘가절을 위하여 엄동설한의 고생을 참고 견디 지 않을 수 없겠지요.
고난은 참으로 복입니다. 꿀같이 달게 받게나이다.
참고 견디기만 하면 이보다 더 큰 복은 없는 법입니다.
불평이 많은 자는 천하를 더 얻어도 오히려 불평할 것이고, 자족을 느끼는 자는
한 줌의 밥과 한 잔의 물에도 자족의 기쁨이 있으니, 그러므로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고 범사 에 기뻐하며 항상 즐거워하사이다.
근심은 만병의 근원이며, 즐거움은 백병의 양약이외다.
구름이 올라가면 피를 이루고, 이슬이 맺히면 서리가 되는 것처럼, 육신의 생각은 근심을 이 루고, 근심이 맺히면 병이 되나니 인생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더이다.

이상입니다. 이렇게 아버님은 아버님대로 감옥에서 온갖 고생하고 계시고, 우리는 바깥에서 이렇게 고생하고 있지 않습니까?
정말 찢어지게 가난했습니다. 내가 이 말을 다 하려면 지금 시간상 다 말씀드릴 수 없어요. 이런 저런 세월이 어느덧 3년이 흘러갔습니다. 그때가 언젠가 하면요.
1943년 5월 17일 날이 다가왔습니다. 5월 17일 날이 무슨 날인가 하면요. 아버님이 집 나간 지 3년째 되던 만기 출소 날짜입니다.
이날은 아버지는 자신도 기다리고 우리 모두 애원, 성도님들, 우리 식구들, 친척들 이날을 손 꼽아 기다려온 5월 17일인데, 이날 아침에 우리 어머님은 너무 기뻐서 어찌할 바를 모 아버님 이 갈아 입을 옷도 챙기시고 신발도 챙기시고, 모두 우리 일곱 식구가 전부 아버님이 갇혀 있 는 광주형무소로 향해서 아버지는 출소 마중을 갔죠.
광주형무소 정문 앞에 웅크리고 앉아 아버지 나오기를 열심히 기다립니다.
하루가 지났습니다. 아버님은 나오시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기다렸으나 아버지 안 나오십니다. 하루 해가 다 지나가고 양 사방 캄캄해 왔으나 그 래도 아버지는 나오시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은 이 날의 아버님이 출소는커녕 오히려 종신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니 이제 우리 아버님은 죽어야만이 이 땅에 나올 수 있는 몸이 아닙니까? 그때 우리 형제 간들이, 부산 산꼭대기 그 낡은 한꺼번에 방에 와서 얼마나 찢어져 우리 소리 소리 지르면서 울었는지, 난 지금도 기억해요.
왜 아버님이 이날 종신형을 선고받았냐 하면 이유가 있었습니다.
물론 일본 간수들도 5월 17일 아버님을 출소시키려고 다 작정을 하고 있었는데, 5월 17일 되 게 그 이전부터 말입니다.
무슨 일이 있었냐 하면은 사상 전환하는 기관이 있었는가 봐요.
사상 전환하는 기관에서 아버님이 소재하고 있던 성경 찬송 다 뺏어버리고 불교 서적을 한아 름 갖다 놓고는 다 읽고 심중의 변화를 일으키라는 뜻이죠.
그래 아버님 불교 서적 다 읽었습니다. 그러고 난 후 불교에서 어떤 가는 스님을 불러다가 아 버님과 설전을 벌이기도 합니다.
불교가 진리냐 기독교가 진리냐 결국 이렇게 했으나 그것도 되지 않았죠.
나중에는 일본에서 또 유명한 목사를 불러다가 아버님과 또 변론을 시키기도 했고,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했지만은 아버님이 신앙을 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결국 일본 간수들이 손양원목사 이리 좀 나오시오.

당신 그동안에 고생 많았어. 지금 집 떠나간 지 3년째인데 얼마나 처 자식들이 보고 싶었겠 어?
그런데 3년이라는 세월 동안에 그동안은 많은 반성도 했을 터인데 아직도 신사 참배를 못하겠 어 공연이 헛수고만 했어 하는 말에 아버님 대답이 그랬습니다.
“헛수고는 오히려 당신들이 했어. 내가 신사 참배하려면 처음부터 하지.
왜 어리석게 3년이 지난 날로 하겠어? 내 신앙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 돌이킬 마 음 전혀 없습니다. 과거 역사로 보면은 우상숭배하는 나라는 다 망했다.
일본도 머지 않아 망할 것이다 하면서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한다“고
우리 아버지 성격이 대쪽 같습니다.
그때가 제2차 대전 뭐야 미일 전쟁 시대 아닙니까?
한참 전쟁이 불붙는 그 시대에 일본이 망한다 해놓으니 이 말을 들은 일본 간수들이 가만히 있겠어.
약이 오를 때로 올라가지고 아버님을 출석시키려고 했지만 아버님의 신앙 문제를 놓고 다시 거론을 합니다.
다시 재판을 열었죠. 그래가지고 재판 결과는 종신형이었습니다.
종신형 결정서를 제가 책을 쓰면서 읽어보았습니다.
대충 이런 이유로서 종신형을 받았더군요.
저 손양원 목사는 밖에 나가기만 하면은 또다시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을 하고 돌아다닐 것이 분명하다.
저 손양원 목사는 절대로 밖에 내보내서는 안 되겠다 그렇게 결론을 지어가지고 종신형이 선 고 내려졌던 것입니다.
아버님이 그랬습니다. 네 좋습니다. 나는 감옥에 있어도 예수님과 함께 살 것이고, 밖에 나가 도 예수님과 함께 살 것인데 예수님과 함께라면 어디 늘 상관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고난을 통해서 만일 더욱 단련된다.
나를 감옥에 가두면 나에게 유익이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이렇게 말을 했답니다.
저희 아버님은요. 신앙생활의 필수 조건 필수 조건은 고난을 말합니다.
고난 없이는 절대로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 하는 것이 아버지 신앙생활의 개념입니다. 아버님이 맨 처음에 감옥에 들어가실 때 나이가 39세 나이 때 끌려 들어갔습니다.
그래가지고 다섯 번씩이나 감옥에서 감옥을 전진을 다니셨는데, 그중에 가장 고생이 많았던 곳은 청주고검수에 있을 때 가장 고생이 많았습니다.
청주고검소에 있을 때는 가끔하에 갇혀 있는 죄수들이 상당히 많이 있었는가 봐요. 도둑질하다 온 죄수들, 살인 강도들. 그런데 이곳에서 아버님이 눈만 떴다 하면은 전도하는 것이 아버지 일이였습니다.
쉴 새 없이 전도합니다. 아무리 시끄럽다고 전도 못하게 한다고 해도 또 전도합니다.
자고 나면 또 전도요. 자고 나면 또 전도요. 결국 저 손양원목사 때문에 시끄러워 못 살겠다 해가지고 아버님을 끄집어내서 독방에 가둬놨어요.

독방에 갖다 놓고는 말 안 듣는 사람에게 주는 감식 밥이 있습니다.
이 감식밥이 뭔가 하면요. 여태까지 주던 밥을 반을 잘라주는 거 이거 하나 벌칙인가 봐요.
이 밥의 크기가 딱 고깜만 하답니다. 안 그래도 적은 밥을 또 반을 잘랐으니 돌아서면 또 배 가 고픕니다.
결국 아버님은 이 밥 가지고는 살아갈 수도 없고 영양실조에 걸려가지고 두 눈이 점점 멀어가 고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 집에 편지 오는 거 보면요. 여보 여보 지금 내가 눈이 점점 멀어가
그 편지 받고 우리 할아버지 우신 것도 말 못합니다.
얼마나 우리 할아버지 우리 아버님 때문에 우신지 말 못해요.
아버님이 청주고검소 독방 속에 있을 때 얼마나 추위와 싸워야 했습니다.
영하 10도를 밑도는 추위가 하루 이틀이 아니었고, 그곳에는 두꺼운 이불이 있을 리도 없습니 다.
양손 양발이 전부 얼어 터집니다. 동상에 걸리고 울다가 또 울고 울다가 또 울고 나중에는 그 만 손톱, 발톱 다 짓물려 빠져버렸답니다.
이곳에 있을 때 아버님은 4개월 헤매고 있었습니다.
영영 실조에다가 독감까지 걸려가지고 4개월 헤매고 검사 판사한테 불려갈 때도 걷지를 못해 가지고 들것에 실려 다녔다고 해요.
아버님은 청주고검소 독방 속에서 쓰신 시가 있습니다.
기도 시가 있는데 이 시는 한때 기독 신문에 나섰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시를 따로 적어왔으니까 여러분 앞에 읽어드리겠습니다.

빈 방을 홀로 지켜 호적을 느끼나 성삼위 함께하니 4식구 되었구나. 갖가지 고난이 옳테면 다 오너라. 괴로움 중에 진리를 체험하리라. 여보 나는 솔로몬의 부귀보다 욥의 고난이 귀하고, 솔로몬의 지혜보다 욥의 인내가 더욱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것은 솔로몬의 부귀와 지혜는 타락의 매개가 됐으나,
욥의 고난과 인내는 최후의 영화가 된 까닭입니다.
죄악을 얽은 육체의 껍질은 벗어야 하겠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연단은 마땅히 받아야 하는 것이며, 지상에서 두 번 돌아오지 못할 세상의 고난의 맛은 하늘의 천사도 부러워합니다. 부귀영화의 뒷끝은 다시 섭섭하나 고난의 뒤는 위로와 기쁨이 다음 차례가 되는 법입니 다.
하물며 주 안에서 고난은 진리가 아니리요. 오 주님, 나에게 있는 부모, 형제, 처자, 기 타 모든 거 다 빼앗아 갈지라도 오직 당신만을 향하는 신앙심만은 빼앗아가지 마옵소서. 모든 건 다 잃어버릴지라도 신앙심만 남아 있으면 모든 건 다 가진 자보다 더 유익한 것이외다

이런 글을 쓰셨습니다.

그때가 제2차 대전 아닙니까? 미국과 일본이 한참 전쟁이 불붙는 아마 크라이막스인 것 같아 요. 제 생각에는
한참 전쟁이 불붙는 시대인 만큼 군대 문제를 상당히 엄격하게 다뤄요.
그런데 우리 큰오빠 나이가 군에 갈 날이 됐으므로 우리 큰오빠에게도 예외가 아니죠.
군에 나오라고 군대 입대 명령장이 날아왔습니다.
군에 가는 거는 별 문제 안 됩니다. 요즘 다 군에 가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시대에 군에 갔다가는 매일 아침마다 신사 참배, 동방여배 이거 빠져나올 길이 없 습니다.
백이면백 다 하게 돼 있어요. 무슨 재주로 매일 아침마다 하나님 이 신사 참배를 빠져나올 길 이 없습니까?
그래서 우리 큰아빠 군대 문제는 우리 가정에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큰아빠 군대 문제를 놓고 할아버님과 어머니와 두 오빠는 그만 금식 기도에 들어갔습 니다.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처음에 큰 오빠(동인)는 도망치려고 했지만은 도망치고 나면 남은 유족을 못 살게 할 것은 뻔한 일 아닙니까?
그래서 그때 우리는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됐죠. 금식기도 맨 마지막 날 하나님께로부터 똑같은 응답을 받았습니다.
어떤 응답인가 하면요. 그때 우리 일곱 식구였습니다.
7식구 우리 산산조각 흩어버리자 흩어버려야만이 큰오빠 군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 같 았습니다.
그래서 일곱 식구를 다 들으라고 하시더니
이제 작정을 했는데 제일 먼저 우리 할아버님은 저 만주 하얼빈에 저희 작은아버지가 살고 있 었습니다.
그곳에다가 우리 할아버지를 보내기로 결정했고, 어머니와 막내와 우리 큰오빠는 저 남해의 깊은 산골에 금식 기도실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여기는 우리 어머님 믿음의 동지들을 모여서 기도하는 곳이었지 그곳에 가서 숨어버리기로 했 고, 우리 작은 오빠는 어디로 가기로 했냐면 저 하동군 옥종영 북방리 산속 음막으로 아까 말 씀드렸죠.
애양원 남은자들이 신사참배 반대로 쫓겨나가지고 그 산속에
바가지 들고 이집 저집 구걸 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 작은 오빠(동신)는 같이 가 있기로 했 고, 나하고 동생은 고아원으로 가기로 각각 결정을 보았습니다.
그때 내 나이가 12살이었고, 동생 나이는 9살이었습니다.
어느날 큰아빠가 나하고 동생을 불러놓더니 동생들아 미안하다.
너희들 고아원에 가야 하겠다 하는데 나는 깜짝 놀랐어요.
오빠 고아원이라니 내 부모 형제가 멀쩡히 살아 있는데 내가 왜 고아원을 가?
나는 고아원에 안 가겠다 했습니다. 아무리 엄마에게 가서 졸랐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죽어도 고아원에 가기 싫어 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막다른 골목에 서 있었지요. 다음 날 아침 되니까 우리 큰오빠가 어디서 자전거를 큰 자전거 를 빌려와서 나하고 동생을 자전거에 싫었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엄마와 형제 간들 다 울면서 작별 인사하고 그토록 가기 싫은 고아원을 향해 달렸습니다.
이 고아원이 어딘가 하면요.
우리 그 법내골 근에서 얼마 떨어지 않은 곳인데 구포라는 데가 있습니다.
뭐야 부산의 사람들은 다 알아요. 구포 지금 많이 번창했는데 그 당시는 벽지였습니다.
아주 구포가 한 외딴 곳에 있었고, 또 일제시대에 신사 참배 반대로 쫓겨 다녔던 목사님들이 이 구포의 에리놀렌이라는 고원이거든요.
이곳에 숨어 지내기도 했어요. 여기는 한정현 목사님이 운영하고 있었고, 한정현 목사님은 우 리 아버님 평양신학 동기 동창입니다.
그래서 한정현 목사님이 운영하고 있는 구포에 있는 이인원이라는 고아원에다가 나하고 동생 은 우리 오빠가 자전거에 실어놓고는 잘 부탁한다고 한정현 목사님에게 우리 동생들을 부탁하 고는 오빠는 그만 대문을 나가버렸습니다.
우리는 고아원에 오자마자 이름부터 바꾸었습니다.
내 이름은 희아라고 고쳐 부르고, 동생 이름은 정은이라고 이름 다 고쳐 불렀습니다.
큰오빠 그냥 도망간거 아닙니까? 지금 그래서 우리 다 이름까지 고쳐 불렀고, 이 고아원에는 우리뿐만 아니었습니다.
유명하신 주기철 목사님 다 잘 아시죠? 감옥에서 순교하신 주기철 목사님, 주기철 목사님의 큰아들 주영진 오빠, 셋째 아들 주영혜 오빠 같은 고아원에서 우리 같이 살았습니다.
그들 처지나 우리 처지나 별다를 바가 없었겠죠. 나는 밤만 되면 엄마 생각, 오빠들 생각 울 기도 많이 울었습니다.
부모에 대한 그리움이 자꾸 쌓이고 쌓이고 나더니요.
나중에는 그만 부모에 대한 그리움은 커녕 부모에 대한 원망, 부모에 대한 미운 마음 이것으 로 돌변해버려요.
여러분 경험 못 해보셨을 거예요. 이거는 경험자만 알아요.
그리움도 없어져버려요. 나중에는요. 그러니까 원망이 나옵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계명이 무엇이길래 내 사랑하는 아버지는 감옥으로 들아가야 하며 내 사랑하 는 어머니와 오빠들과 헤어져야 하나? 어찌해서 내 부모님은 별난 예수를 믿어서 우리를 이렇 게 고아가 되게 하나 하면서 이렇게 부모님을 원망하면서 그렇게 세월은 흘러가고 있었습니 다.
내가 고아원에 오고 1년이 지났습니다. 하나님 고아원에는 깜짝 놀랄 일이 발생했습니다.
한 대낮이었는데 대낮에 그늘진 고목나무 밑에다가 돗자리를 깔아놓더니 한정현 목사님과 한 19명 되는 교우들이 돗자리 위에 둘러 앉아서 대낮에 예배를 드렸는데 이 예배는 보통 때 예 배와는 아주 달랐습니다.

하도 예배가 무슨 난리 나듯이 예배를 드렸는데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들은 울고불고 한데 얽히고 설키고 찬송을 큰소리를 부르면서 예배를 드리는데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다.
나는 감이 잡히질 않아서 예배 끝나기만 기다렸는데 마침내 요란스러운 예배는 끝이 났습니 다.
끝나자말자 한정현 목사님이 나를 찾았습니다. 나를 보더니 희아 너 이리 좀 오너라 하면서 내 손을 턱 잡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희야 너 그동안에 고생 많았지.
오늘 8월 15일이다. 8월 15일 해방이 되어 너희 아버님이 지금은 감옥에서 나오신단다.
일본이 망했단다. 일본이 원자탄을 먹고 손을 들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너희 아버님이 나오신다 하는데 나는 다른 말은 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진 다.
그때 내 나이가 13살이었죠. 12살에 가가지고 1년 만에 아버님이 감옥에서 나오신다 하니 눈 이 번쩍 떠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 말이 믿어지질 않았지요.
왜냐하면 아버님은 지금 감옥에서 어떻게 돼 있습니까?
종신형을 선고받아 죽어야만이 이 땅에 나올 수 있는 몸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어머님이 저희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어요. 이 땅에서는 아버님 만날 생각하지 말고 다 잊어 버리라고 그래서 실제로 우리는 아버님을 잊으려고 애를 썼고 다 잊어버렸어요.
그러한 아버님이 815 해방인지 뭔지 해가지고 감옥에서 나오신다 하니 이것은 마치 죽었던 사람이 살아 돌아온다는 말같이 들렸지요.
기적이 아니고야 무슨 그럴리가 싶었습니다마는 바로 이것은 기적이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옥중 성도들의 눈물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이 감격스러운 날에 정말 내 기억에서 멀고 본 아버지로 하는 사람이 어떻게 찾아내는지 저희 들이 있는 고아원에 찾아오셨습니다.
이때 저희 아버님은 정말 볼품 없는 모습. 5년 동안은 감옥에서 얼마나 굶고 또 굶고 더 고생 을 했는지 뼈만 가죽만 남아 있었고요.
얼굴은 송장 같았습니다. 거기다가 낡은 쓰레빠에 푸른 제수복 차림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남들은 다 가정이 있어가지고 해방이 됐을 때 옷과 신발 가지고 출소 마중 갔지만은
우리 가정은 그때 어떻게 돼 있습니까?
산산조각 난 가족이 됐어요. 아무 한 사람도 아버지 출소 마중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아버님이 고아원에 와서 옷과 신발을 바꿔 입었습니다.
그리고 아버님은 오시자마자 우리를 찾았습니다.
아버님은 나를 발견하고는 꼭 껴안았습니다. 이놈들은 얼마나 그동안에 고생 많았냐 하면서 아버님은 나를 끌어안았을 때 나는 비로소 아버님 품에 안기여 이것이 꿈이 아닌 현실이구나 하고 아버님도 울고 나도 따라 울었습니다.
조금 있으니까 주기철 목사님의 셋째 아들 주영희 오빠가 8월에 해방이 되어 손양원 목사 감 옥에서 출소했다 하는 말을 어제 전해 듣더니 막 뛰어옵니다.
뛰어오더니 우리 아버님을 꽉 끌어안더니 목사님 제가 주기철 목사 아들 주영희입니다.

한마디 하고는 둘이서 얼마나 붙들고 통곡을 하는지요?
주기철 목사님은 우리 아버님보다 나이가 5살 위입니다.
기철이 형님, 기철 형님 가장 존경하는 분이 기철 형님이었고, 우리 아버님이 주기철 목사님 에게로부터 어떤 순교의 정신을 이어받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제가 책을 쓰면서 군데군데 발 견을 했습니다.
제가 시간상 다 자세히 말씀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한참 주영이 오빠는 우리 아버님을 끌어안고 울더니요.
그만 고아원 그 마루 밑에 놓여있는 도끼가 있었습니다.
도끼를 꺼내더니 눈을 감아 쥐고는 어디로 가 막 달음발치는 것입니다.
온 원생들 뒤따라 갔지요.
어디로 갔냐 하면은 고아원에서 멀리만이 떨어진 곳에는
큰 공원이 있었습니다. 공원 이 공원에는 오고 가는 사람에게 절하라고 신사 우상을 거기다 만들어 세워놨어요.
아니 그리로 쫓아가더니 주영이 오빠는 도끼를 치켜들더니 단 한방에 이 신사 우상을 때려 부 숴버려고는 어디론가 달아나버렸더군요.
얼마나 한이 있었으면 이렇게 했겠습니까? 주영이 오빠 주영이 오빠 고생만 했어요.
우리 오빠가 은 공장에 다닐 때도 같이 다녔고 내 고아원에 올 때도 같이 같은 고아원에서 해 방될 때까지 같이 살았지 고생 많았고 우리 두 오빠들과 절친한 친구였고 주기철 목사님이 감 옥에서 순교했을 때도 제일 먼저 우리 집 와서 순교 소식을 알렸던 분이 주영이 오빠였습니 다.
이제 우리는 8월에 해방이 되어 나는 고아원에 살 필요도 없고 오빠들은 군에 도망갈려고 피 신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고 옛 고향으로 되돌아갑니다. 애아원이죠.
애양원을 떠나간 지 꼭 5년 만이었습니다.
그런 옛 고향 애양원으로 되돌아왔습니다. 뿔뿔이 흩어졌던 우리 가족들 모두 모두 한 곳에 모였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학교를 못 다녔는데 이제 학교에 가야 하는데 학교에 가려니 나이가 너무 많이 차가지고 학교에서 나이 많다고 안 받아줘요.
5년이라는 기간 동안에는 공백이 많았다 아닙니까?
그래가지고 학교에서 안 받으려는거 아버님 목사님이 간신히 간신히 학교장에게 찾아가서 사 정사정해서 학교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그래서 우리 큰오빠는 사범학교 4학년, 작은 오빠는 순천 중학교 2학년, 나는 국민학교 4학 년, 동생은 국민학교 2학년으로 각각 입학을 했습니다.
근데 애양원 근처는 지금도 그렇지만 학교가 없어요.
애양원 근처는 그리고 순천에서 학교를 다녀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순천에다가 자취방을 얻어 자취 집을 마련해가지고 공부하는
형제 지간들은 순천에 모여 살고 어머니와 아버님은 애양원에서 살면서 이렇게 두 살림이 시 작됐어요.

그래 우리는 학교에 가는데 이 행복은 참 절정을 이루었지만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그 행복 대단했지요. 이때부터 나에게는 커다란 태풍이 불어닥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순천 매산 여중 1학년일 때였습니다. 그때 때마침 학교에서 소풍 가는 날이었어요.
나는 이날 아침에 아침밥을 먹고 소품 가방을 메고 대문을 막 나섰는데 갑자기 우리 큰아빠가 날 보더니 동희야 하면서 나를 불러 나가려 하니까 그래요.
오빠 왜 그래요? 갔더니 내 가방을 열더니 딴 아들이 뭘 많이 가져가는데 너는 곁에 엄마가 없어서 뭘 많이 못 쌌지? 하면서 준비했던 과자 봉지 더 넣어줘.
용돈을 더 집어줘요. 그리고 오빠 고마워 내가 소풍 잘 다녀올게요 하면서 내가 뛰어나가는데 두 번째를 또 불러요.
오빠가 그런 식으로 더 조금 전에 하던 일 되풀이하고 세 번째나 그렇게 불렀어요.
세 번째 나는 화가 났어요. 오빠 왜 자꾸 날 부르느냐고
그래서 오빠의 얼굴에 심각한 거 해가지고 아무 표정도 없어요.
그러면서 내 눈을 많이 들여다보면서 우리 동희 예쁜 동희 너 오늘 소풍 잘 다녀와야 해 그만 하려고 부른 거야 하면서 고개를 돌리기에 나는 이렇게 소풍가기 바빠서 뛰어나간 것이 이것 이 이 땅에서 그만 오빠를 보는 마지막이었습니다.
내가 소풍 다녀왔을 때는 이미 두 오빠는 시체로 변해 누워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 소풍은 어디로 갔냐 하면 애원원 근처 신성포로 갔습니다.
소봉날은 즐거웠습니다. 소봉 하루하루를 마치고 소봉 다음 날은 그때 학교에서 수업이 없었 기 때문에 우리 자취방으로 자취집으로 가지 않고 순천에 있는 어머님이 계신 애양원을 바로 그리로 걸어서 갔지요.
그리고 다음 다음 날 밤이었습니다. 우리가 저녁을 먹고 우리 어머님은 부엌에서 저녁 설거지 를 마치고 잠시 쉬고 있을 바로 그때였습니다.
저 앞에서 트럭 소리가 한데 울리고 있었는데 그 트럭 소리는 점점 커지더니
우리 집 앞에 딱 멈췄습니다. 트럭위에는 공산당들 학생들이었습니다.
양손에 무기를 들고 뛰어내리면서 손양원 목사 이래 나오다가 고래고래 고함을 치면서 우리 집에 들이닥치기 직전인데 아버님은 그때 집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아버님이 안계신다고 말했지만 그들은 우리 말을 믿지 않고 신발을 신은 채 방으로 뛰어들더 니 이방지방 구석구석 아버님을 찾습니다.
아버님이 안 계시니까 나중에는 막 천장을 넣고 막 총을 몇 번 쏘기도 하고 죽창을 마래 밑에 넣어보기도 하고요.
우리 어머니하고 나에 겁에 질려가지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는데 이놈들이 아버님이 없으니까 뛰어가더군요
이제 튀어나가면서 맨 마지막에 한 놈 그놈이 어머 이것들 지나면서 하는 말이 당신이 알고나 있어 당신 아들 어저께 두 놈 다 총살당해 죽었어 하고 휙 달아나버렸습니다.
그만 어머님은 이 자리에서 기절해 버렸습니다. 동인아 동신아 어머님은 정신을 못 차렸는데 이 수업시간에 삽시간에 애양원에 퍼져가지고
애양원 사람들이 몰려오더니 사모님 사모님 진정하세요 저공산당들 말 다 믿을 수 없어요. 아니 목사님 잡아갈 목적이지 학생들을 왜 데려가요 거짓말일 거요.

학생 입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가 전부였는데 어떻게 우리가 그 말을 믿을 수 있어요?
간신히 정신은 차렸는데 그 순간 내 머리 맛을 스쳐 지나가는 기억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내가 아이가 소풍 나올 때 이유 없이 세 번씩이나 나를 불러세우던 그 오빠.
그것은 어떤 오빠의 예감이 아니었을까 다시는 못 본다는 막연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어떤 예 감의 지시를 받고 그렇게 애타게 세 번씩이나 나를 불러세운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막 머리에 떠오르는데 내가 이대로 떨고 있을 때만 아니었습니다.
나는 이 두 눈으로 내 두 오빠의 생사를 확인해야만 했습니다.
나는 순천을 향해 뛰어야만 했습니다. 순천을 향해 뛰었습니다.
그때는 기차를 다 공상단들이 기차 철로를 끊어가지고요.
기차를 기차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순천을 향해 뛰었지요
여수와 순천에게는 험악 했습니다. 공산당들은 지세상을 만난 듯이 공산주의 만세를 부르면서 시뻘건 눈길을 휘두르면서 총칼을 맨 공산당들이 조그만 사람을 보면 다 쏴버립니다.
사람의 목숨이 파리 목숨보다 못한 시절이었죠.
내가 기억 속에서 순천시에 도착했을 때 그것을 참 눈 뜨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온 신장로 간에 시체가 산더미를 이루고 있었고, 그 사람 썩는 냄새 피비린내 전봇대에 매달 아 놓은 시체, 불에 탄 시체, 알몸으로 죽은 시체.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여수순천 반란 사건의 비극의 현장입니다.
여수순천 반란 사건은 제주도 43 사건부터 이어져 온 것이 여수순천 반란 사건입니다.
그러나는 간신히 간신히 순천에 살고 있는 우리 집 대문 앞까지 왔습니다.
대문이 활짝 열려 있었는데 아무리 큰오빠, 작은오빠 불렀으나 아무 쥐죽은 듯이 조용했습니 다.
한쪽 옆을 보니까 건물은 핏자국들이 뚝뚝 떨어져 있었습니다.
나는 그만큼 피를 보는 순간 기겁을 했습니다. 아이고 죽었구나 죽었어 내 두오빠가 죽었구 나.
조금 있으니까 우리 옆방에 사는 양 집사님이 왔습니다.
양 집사님이 오더니 동희야 동희야 너의 두 오빠가 죽었단다.
내가 너의 두 오빠 시체를 찾아서 딴 곳에 옮겨놨다 하시면서 양집사님 나를 데리고 갔는데, 나는 우리 옆방 양집사님을 따라갔더니 어느 산모통이 눈두둑에다가 가마니를 깔고 우리 두 오빠의 시체는 그 위에 쓸쓸히 누워 있었습니다.
얼마나 얻어맞았는지 모두 친했던 친구들이죠. 온몸에는 피투성이로 만들어 놓았고, 이 가슴, 얼굴 등등에는 총알 자국이 수없이 나타나 있었습니다.
나는 그만 울며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이때 내가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내가 원망한 것은 공산당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내가 원망한 것은 하나님 한분 밖에는 원망할 때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우리 두 오빠의 시신을 끌어안고는 저 하늘을 향해 고래고래 악을 쓰기 시작했 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하신 일이 고작 이런 것들인가요?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데, 왜 죽었습니까?
왜 죽이셨어요? 전지전능의 하나님은 다시 살려내라고 얼마나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밤새도록 저는 울었습니다.
우리 두오빠를 지켜 주지 않았던 하나님이 그렇게 미울 수 없었습니다
한 사람만 데려가도 억울한데 왜 한꺼번에 둘씩이나 데려갔는지 난 알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하나님 하늘을 향해 막 삿대질을 다 했습니다.
하나님 두고 보시오. 내가 예수 믿는가 봐요. 예수 안 믿겠다고 하나님이 어딨어? 하나님이 어딨어? 이때부터 난 방황하기 시작했습니다.
고생 많이 하던 우리 두오빠였습니다. 우리 큰오빠 나이가 25세였고, 작은 오빠 나이는 19세 였습니다.
짧은 인생을 너무나 허망하게 하셨습니다.
두 오빠의 장례식을 마치고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여기저기서 소문이 들려옵니다. 동인이 동신이 죽인 놈 잡았다.
그놈은 큰오빠 같은 학교 3학년 강철민으로 밝혀졌습니다.
강철민 그놈은 우리 두 오빠 친구들에게 붙들려가지고 무수히 매를 맞고 사형 선고를 받아 사 형 집행 날짜만 기다린다고 여기저기서 소문이 들려오는데요.
난 이 소문을 들었을 때 내 두 오빠 죽인 그 원수를 내 손으로 죽이려고 이를 갈고 있었습니 다.
그런데 우리 아버님 생각은 내 생각과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아버님은 두 아빠지 강철민 학생을 사형장에서 빼내가지고 아들 삼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나는 설마 했는데 무슨 그렇게까지 실제로 아버님 그걸 실행에 옮기려는 거예요.
나는 여기서 크게 반발했습니다.
나가 막 화가 밀쳐 올라오더군요. 아버님 그런 놈 죽도록 내버려 놔둬요.
그런 놈 안 죽으면 누구를 죽인단 말입니까? 아버지 이러지 마세요 하면서 내가 아버지에게 극구 부인하며 말렸지요
그랬더니 내 태도가 심상치 않거든요. 그러니까 우리 아버님이 이때부터 나를 설득시키기 시 작합니다.
동희야 날 쳐다보아라. 내 어차피 하나님이 내가 이 10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내가 과거에 감 옥에서 고생했고 너희들까지 고생을 시켰는데 강철민 그 학생을 안 잡았으면 모르거니와 일단 그 학생을 잡았다는 말을 듣고는 내가 이대로 모른 척할 수가 없구나.
제1계명과 2계명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면은 원수를 사랑하라 이 똑같은 하나님의 명령 아니냐 그런데 내가 어째서 저 명령을 순종하면서 이 명령을 순종하지 않는다면은 얼마나 큰 모순이 냐 원수를 사랑하라 하는 이 명령 내가 만일에 안 지킬 것 같으면은

내 과거에 감옥 살았던 거 헛살았고 너희들 고생시킨 것도 헛고생시킨 것이 되고 만다. 그래 내가 여기까지 와서 넘어질 수가 없구나.
아무리 좋은 말로써 아버지 나를 설득시켰지만은 그 말은 내 귀에 통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다
원수 같은 놈 강철민이 죽어 이 세상에 없어져야만이 어느 정도 내 마음이 한이라도 풀릴 것 만 같고 우리 죽은 두오빠의 한이라도 풀릴 것만 같았습니다.
나는 이러한 아버지를 이해할 수가 없어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아버지에게 또 소리쳤습니다. 아버지 용서하면 용서했지 아들 삼는단 말이 또 무슨 말입니까?
아버님이 그놈을 아들 삼을 것 같으면은 나에게는 오빠가 되는 것인데, 내 두 오빠 죽인 그 원수가 어떻게 내 오빠가 된다는 말입니까?
하늘 아래 이런 일이 있을 수 없는 일 아버지 제발 이러지 마세요.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예수를 못 믿습니까? 그래서 내가 아버지에게 막 또 대들었더니 아버님이 그래요
“동희야 성경 말씀을 자세히 보아라.
성경 말씀에 원수를 사랑하라 했다. 용서만 가지고 안 된다. 사랑하라 하라 했으니 아들 삼아야 되지 않겠냐“
아버지 세계와 내 세계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우리 아버님이 이 세상 그 누구의 말보다도 하나님의 명령 한마디로서는 그것을 끝내버립니 다.
내가 그걸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결국 항복했지 그래서 아버님은 사형 직전에 처해 있는 강 철민 구해 내 가지고 아버님이 아들로 받아들였고, 저 부산에 있는 고려고등 학교에 입학을 시켜 독실한 신자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는요 한때 아버님을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왜 아버님은 자기 처자식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신앙만 고집했는지 그래 그래 내가 그 당시에 는 아버지를 그렇게 원망했지만은 내가 나이가 들고 보니까 아버님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버님은 처음에 감옥에 끌려 들어가실 때 우리 할아버님께서 마지막으로 주신 성경 구절을 아까 읽었죠.
마태복음 10장 37절에서 39절까지 말씀 아버지는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 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자기 십 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않는다는 그 말씀을 끝까지 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한때는 하나님을 부인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딨어 하나님이 어딨어 하면서 하나님 을 원망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요. 내가 나이가 들고 보니까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정을 딱 점을 찍어넣고 하나의 믿음의 모델을 만드시려고 믿음의 표본을

만드시려고 그렇게 하셨다는 사실 나는 뒤늦게나마 깨달았습니다.
한 시대의 어떤 역사의 진실은요 어지러운 것에 대해서 잘 몰라요.
많은 세월이 흘러가야 지나간 날들을 되돌아보면 그때 역사의 진실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 다.
하늘의 씨앗은 땅에 떨어져가지고 그 씨가 죽지 않으면요.
싹이 나지 않아요. 많은 순교자들 또 죽은 우리 두 오빠 아버님, 또 많은 순교자를 그들은 죽 은 것 같지만은 죽은 게 아닙니다.
그들 씨 제 안에는 한 알의 씨앗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 씨는 지금 싹이 나고 이어서 많은 사람들을 깨우치는 하나에 믿음의 표본을 만드셨습니다. 주기철 손양원목사님 하나님께서 표본을 쓰시려고 그렇게 하셨다는 말 저는 뒤늦게나마 깨달 았습니다.
제가 이것으로 간증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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