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yhim

진재혁 목사 다니엘기도회 본문

다니엘기도회/목사 다니엘기도회 간증

진재혁 목사 다니엘기도회

generalQS 2024. 2. 12. 16:29
728x90
반응형
SMALL



제목 : 아버지의 마음
본문꞉ 누가복음 15꞉20~24
설교 ꞉ 진재혁 목사
현) 월드비전 이사 현) 미드웨스턴 침례신학대학원(MBTS)초빙교수 현) 지구촌교회 담임목사
 
이분들에게 이렇게 인사해 볼까요? 오늘 참 아름다우십니다. 한번 이렇게 화답해 보십시오. 그건 당신의 눈이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어느 교회 갔더니 소개를 그렇게 시키더라고요. 당신의 아름다움이 죄라면 당신은 사형감입니다. 아름다운 밤입니다. 오늘 이 밤에 하나님 앞에 나오는 우리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또 귀하고 또 아름다울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오늘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나 누고자 합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저희 부모님을 따라서 외국에 이민을 갔습니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영어였습니다. 그 당시에 배웠던 영어가 지금도 기억합니다. 굿모닝 미스터 베이컬 하우드 유 미스 그때 배웠던 것 중에 이렇게 배웠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는 하우드 유드 좀 알고 난 다음부터는 하와유. 근데 미국 가서 보니까 하우드 유는 아무도 쓰지 않더라고요. 저희 부모님이 3남매, 중고등부에 있던 3남매 저희를 데리고 가셔서 영어를 빨리 배우게 하기 위해서 맥도날드 같은 데 가면 3명이 돌아가면서 순서대로 영어로 주 문을 하도록 시키셨습니다. 제가 가서 콜라를 달라고 콕을 달라고 하면 꼭 커피가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더 슬픈 것은 잘못 나왔다는 말을 영어로 할 줄 몰라서 늘 쓴 커피를 마셨던 상처가 아직도 있습니다. 외국에서 제일 어려운 것 중에 하나는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 니다. 한국에 와서 보니까 음식 주문이 참 쉽습니다. 여러 명이 가도 메뉴는 하나밖에 안 줍니다. 그럼 그중에서 제일 위에 분이 딱 잡고 오늘 이걸로 하지 하면 다 그거 먹습니다. 그런데 외국에 가보니까 한 사람 한 사람당 웨이트레스가 와서 일일이 질문합니다. 빵은 어떤 빵으로 할 건지 수을 할 건지, 샐러드는 어떤 샐러드 드레싱은 어떻게 고 기는 어떻게 사이드신은 어떻게 샐러드 드레싱은 제대로 이해도 안 됩니다. 노 노 노 거의 고문 당하듯이 주문을 합니다. 한 명이 겨우 끝나면 옆에 있는 분들 다 미투 미투, 결국 다 같은 걸 먹습니다. 제가 아는 분 한 분은 한국에서 미국에 왔는데 식당에서 음식 주문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머리를 썼습니다. 발음이 되는 음식 하나를 정해서 그것만 시키면 되겠다 싶었습니 다. 이렇게 보니까 애플 파이가 발음이 되더랍니다. 그래서 그다음부터 식당에 갈 때마 다 웨이트레스가 와서 묻습니다. 케나 애플 파이, 애플 파이 그래서 애플 파이만 열심히 먹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계속 애플파이 먹으니까 질리기 시작합니다. 식당에 들어가는데 누가 이렇게 보니까 햄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데 그렇게 맛있게 보이더랍니다. 마음의 생각이 들기를 내가 오늘은 용기를 내서 애플 파이가 아니라 햄 샌드위치를 지켜봐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습니다. 자리에 앉았습니다. 웨트스가 왔습니다. 캐나 하피 햄 샌드위치 못 알아듣습니다. 햄 샌드위치 햄 샌드위치 와 애플 파이. 그래서 파이를 먹었다고 합니다. 두 개 나 100원 다 다 의아 이거 줄게 너 어디서 샀어? 알파 한둘에서 팔던데 사드 조식 한다고 알 파에 네모 수행 남아 있던데 이거 어 아니 네모 순이 살아 남아 있어 샌드위치야 너도 먹으라고 만들었지? 나 안 먹을 것 같아 왜 했는데 안 먹어도 되지 먹어 이거 만들었잖아 성아도 아침에 먹었어. 잘게 이리로 와 이거 갖고 와. 친구들이 시작. 어딜 가는데 안다고 밥 먹고 그게 먹어라. 먹을려는 거야. 지금 괜찮아 알려줘. 반찬을 뭘 만들어야 되나 저장 모드가 종료되었습니다. 미 국물 회송 수프가 맛있는 식사를 시작합니다. 여기 앉아 여기다 해도 돼. 여기 맞긴 한데 이건 저녁을 먹어야겠지 하나 더 안 먹어 안 먹어 외국에 가서 제 한국말 이름이 제대로 발음이 안 됩니다. 그래서 저희 부모님께서 성경에 나와 있는 인물들 중에서 저와 성격이 가장 비슷하 다고 생각하는 분의 이름을 제 영어 이름으로 지어주셨는데, 그래서 제가 갖게 된 이름은 피러 베드로입니다. 제가 진시니까 피러진 피러진 이렇게 발음을 합니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 보니까 피러라고 발음을 안 하고 다 피터 이렇게 발음을 합니 다. 제가 진시니까 피터진 피터진 집회를 갔더니 소개합니다. 피터진 목사님 나오시겠습니다. 어떤 분은 그러니까 성인 피신작 또 피 목사님이라 고 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외국에서 한 30여 년 정도 있었습니다. 저도 결혼을 하고 아이들 셋을 낳았 는데 그 아이들이 거기서 태어나고 한국말 거의 못하고 중고등부가 되었을 때 하나 님께서 한국으로 저희를 불러주셨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저희 삼남매 아이들과 아내와 함께 한국으로 나오면서 그동안에 있 는 모든 것들이 이렇게 제 마음에 와닿기 시작합니다. 30여 년 전 한국말밖에 못하고 영어 거의 못했던 저희 삼남매를 데리고 외국으로 향했던 부모님의 마음, 한 30여 년이 지난 후에 한국말 거의 못하는 삼남매를 데리 고 다시 한국으로 나오는 부모인 저의 마음, 이 두 가지 마음이 이렇게 교차되면서 여러 가지 마음의 생각을 갖게 합니다. 아버지의 마음 오늘 성경에 보면 한 아버지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탕자의 비유해서 등장하는 아버지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너무나 좋아합니다. 주일 학교 때 총국 대회를 하면 결코 빠지 지 않는 이야기, 가장 우리에게 익숙하며 가장 가깝게 와 있는 이야기가 이 탕자의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이 탕자의 비유가 우리에게 가까운 이유는 오늘 이 이야기 속에 나오는 탕 자의 삶 가운데 우리 자신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성경학자들은 이야기합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탕자의 비유라는 이 제목 은 사실 탕자가 이 이야기의 중심이 아니라고 이야기합. 아니 오히려 이 이야기 가운데 정말 중요한 분은 바로 집 떠나갔다가 돌아온 탕자 가 아니라 그 탕자를 받아주고 있는 바로 그 아버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탕자의 비유가 아니라 사실 아버지의 비유라고 이야기할 정 도로 오늘 이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중심은 바로 그 아버지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 와서 자기의 분기을 달라고 합니다. 아니 분킷을 요구하고 받는 것은 아들로서 당연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에 받는 분킷이었습니다. 살아있는 아버지에게 지금 분깃을 달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가 빨리 세상을 떠났으 면 좋겠다고 하는 불효 같은 안 좋은 일입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을 향해서 여전히 그 분깃을 나누어 줍니다. 탕자는 그것을 가지고 먼 나라에 갔다고 이야기합니다. 허랑방탕한 삶을 삽니다. 자기의 모든 것들을 다 잃어버리고 흉년을 맞이하며 궁핍 한 모습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탕자의 문제가 무엇일까요? 탕자의 가장 큰 문제는 그가 그렇게 많은 재산을 낭비 함에 있지 않습니다. 탕자의 가장 큰 문제의 시작은 그가 아버지의 품을 떠났을 때 그의 인생의 비극은 시작됩니다. 아버지와 함께 있던 그가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보다 아버지의 것을 가지고 자기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것을 향해 먼 나라로 떠나는 순간부터 그의 삶 가운데 인생 의 비극은 시작됩니다. 오늘 성경은 흉년이 잃어 그가 모든 것들을 다 잃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가 궁핍했습니다.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굶주렸다고 이야기합니다. 비참한 삶 가운데 있습니다. 고달픈 삶의 시작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는 돼지 치는 잡을 얻습니다. 돼지를 친다는 것은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가장 저주스러운 직업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돼지를 치면서도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도 그에게 주는 자가 없었다라고 성 경은 말씀하시며 그가 얼마나 굶주렸는지, 얼마나 궁핍한지, 얼마나 비참한 삶 가 운데 있었는지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나는 삶, 내 마음대로 갖고자 했지만, 그 아버지의 사랑을 얻을 수 없는 다른 곳에서 얻고자 하는 그곳이 바로 먼 나라가 됩니다. 나를 사랑하는 아버지의 음성보다 또 다른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떠나는 그것이 집 을 떠나는 모습을 성경은 설명합니다. 그렇게 먼 나라에 가 궁핍한 가운데 있었던 아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성경은 그가 그런 가운데에서 이렇게 고백하는 것을 봅니다. 내 아버지 집에 그 얼마나 풍족한 품꾼이 많은가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가 다시 정신을 차렸다고 이야기합니다. 되돌아 생각해 돌이켜 보았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나는 여기서 주여 죽는구나라고 이야기하며 자기의 상태를 고 백합니다. 내가 정말 살 길은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구나. 그 길은 쉽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정말 필요한 것 아버지였구나라는 사 실을 깨닫고 내게 정말 필요한 그 풍성함이 아버지께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탕자 의 모습을 보십시오. 성경은 그가 이에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아버지 품에 있는 삶의 모습의 풍 성함이 우리 가운데 있습니까? 아니면 정말 많은 것들을 하고 있고 누리고 있다라 고 생각하지만, 아니 그것만 있으면 행복할 거라고 내가 더 많은 것들을 갖고자 하 지만 정작 인생의 흉년 가운데 정말 영적인 궁핍 가운데 허탈하고 외롭고 그렇게 비참한 삶의 모습을 우리 가운데 가지고 있다면, 오늘 그 아버지 집을 향해 집을 떠 나는 당자의 모습을 보십시오. 내 아버지 집에 얼마나 풍족한가? 내가 여기서 주여 죽는구나 아니고 내가 집에 돌 아가야 하겠다. 오늘 그 집을 향하는 탕자의 발걸음. 오늘 그 탕자를 향해 맞이하시는 하나님 아버 지 오늘 이 탕자의 아버지를 통해 우리를 향해 보여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을 성경은 설명합니다. 이 아버지는 어떤 아버지입니까? 첫째로 이 아버지는 기다리시는 아버지십니다. 웨이팅 그 아버지가 아들을 기다리시는 것을 봅니다. 20절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느라 아직도 거 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아들이 돌아옵니다.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아니 오히려 성경이 이렇게 말씀한다면 좀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요? 아들이 돌아 오다가 집 근처에 와서 있는 아버지를 보고 달려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아버 지라고 용서를 구하는 장면.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본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먼저 보았다라고 말씀하고 있습 니다. 어떻게 이 아버지가 아들을 먼저 볼 수 있었을까요? 아들이 언제 어떻게 돌아오는 걸 알고, 어떻게 아버지가 아들을 먼저 볼 수 있었을까요? 이 해답에 대한 가장 유 일한 답이 있다면 아버지가 아들을 향해 기다리고 있었다면, 집 떠난 아들을 향해 그 떠난 그곳을 향해 하루 온종일 바라보며 돌아오는 아들을 돌아오기를 원하고 기 다리고, 그렇게 찾고 있었다면 오늘 이 말씀처럼 아버지가 아들을 먼저 볼 수 있습 니다. 성경은 이 말씀을 좀 더 정확하게 우리에게 말씀하기 위해서 또 하나의 중요한 큰 물을 더해 주십니다. 뭐라고 말씀합니까? 20절 아직도 거리가 먼데 거리가 멀었습니다. 아니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아들을 먼저 보았다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아들의 모습이 어땠을까요? 아마 많은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에 갈 때는 얼마나 의기양양했을지 모릅니다. 금이 환양을 꿈꾸며 비단 옷을 입고 자신만만하게 길을 떠나지 않았을까요? 그런 데 모든 것들을 다 낭비하고 흉년이 들었습니다.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도 먹을 수 없을 정도로 굶주렸던 이 아들의 모습을 한번 상 상해 보십시오. 살 빠졌을까요? 엄청 빠졌을 겁니다. 헤어스타는 어땠을까요? 엉망이었을 겁니다. 돼지를 쳤으니 얼마나 더럽고 추한 몸, 옷 어땠을까요? 다 찢어져 나가며 보잘 것 없었을 것입니다. 아니 피골이 상접해서 옆에 있어도 이게 정말 그 아들인가 알아보기도 힘든 그 아 들이 거리가 먼데 돌아오는 그 장면을 아버지가 아들을 먼저 볼 수 있었다는 것. 아들을 향해 기다리는 아버지의 눈 밖에는 볼 수밖에 없는 그 아버지의 모습을 성 경은 설명합니다. 아버지가 기다리면 무슨 뜻입니까? 아버지는 이미 집 떠난 그 아들이 돌아오기를 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미 그 돌아오는 아들을 향해 이미 다 용서했습니다. 기다리고 있습니다.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집 떠난 아들, 그 방향을 향해 하루 온종일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 이미 용 서했습니다. 이미 용납했습니다.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돌아오면 생각해 보자가 아닙니다. 돌아오면 용서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했으니 돌아오라고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십시오. 오늘 성경은 바로 이 아버지가 우리의 아버지 되심을 말씀합니다. 우리 어디 있든지 집 떠난 우리를 향해 아버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의 시선은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먼 나라에서 혼자 외로움 가운데 있는 우 리를 돌아오기를 바라는 눈길로 바라보고 계시는 아버지의 시선. 돼지 치는 그 잡 가운데 고난과 힘든 가운데 있는 우리의 애처로 영혼을 바라보고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눈. 오늘 그 아들을 먼저 보고 기다리시고 그렇게 돌아오기를 원하셨던 아버지의 모습 을 봅니다. 저희 가정은 저희 아이들이 어렸을 때 아프리카 케냐의 선교사로 나간 적이 있습니다. 3년 동안의 케냐에서 선교사로 섬기면서 1년 동안은 케냐 교회를 그리고 나중에는 교회를 개척하고 티칭 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첫 한 해 동안에 한 케냐 교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저희 아이들을 세고 아내 와 예배를 드리는 중에 둘째가 아들입니다. 예배 중간에 아들이 화장실 가야 된다고, 큰 거 가야 된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아빠인 제가 아들을 데리고 화장실로 향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예배 중에 있습니다. 본당에 모여 있고 떨어져 있는 화장실에 아이만 데리고 제가 단둘이 갑니다. 그 교회는 케냐에 꽤 좋은 교회였지만 여전히 케냐식 교회였고 화장실은 두 문이 있으면서 문을 닫아놓고 정말 썰렁하고 정말 좁지 않게 보이는 곳이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그곳에 저는 아이를 화장실 안에 집어넣고 문을 닫아주고 이야기합니 다. 아빠가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너 빨리 해. 빨리 끝나고 다시 들어가자. 그리고 기다리기 시작합니다. 한 10분쯤 지났는데 화장실 속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아빠 거기 있어 묻습니다. 아빠 아무 데도 안 가. 빨리 하고 빨리 해. 아빠 기다릴게. 빨리 해. 그리고 다독거렸습니다. 한 10분 있었더니 또 소리가 들립니다. 아빠 아직도 거기 있어 그래요. 아무 데도 안 간다니까 기다리고 있잖아. 니가 빨리 해야 들어가지. 빨리 해. 아빠 기다린다. 10분 있다. 또 목소리가 들립니다. 아빠 거기 있어. 세 번째 들리니까 저도 모르게 속에서 뭔가 뜨거운 게 확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빨리 해야 들어가는데 하지는 않고 계속 질문하는 아이를 향해서 한 번 호통을 쳐 야 되겠다고 뭔가 속에서 뜨거운 게 쫙 올라오다가 갑자기 입 앞에서 생각나는 성 경 구절이 나서 성경 구절 암송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얘기했어요. 내가 너를 떠나지도 버리지도 아니하리라 히브리서에 있 는 말씀을 저도 모르는 사이에 암송을 딱 하고 난 다음에 그다음에 제가 놀랐습니 다. 이 말씀의 뜻이 이런 것이었구나. 그렇게 늘 암송했는데 그렇게 와닿지 않는 말씀 이 그 순간에 화장실 문 안에서 문 닫고 정말 아빠가 나를 기다릴까 나 여기 혼자 있는데 아빠가 정말 나를 기다리고 있는가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 아이 내가 너를 떠나지도 버리지도 아니하리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가 어떤 곳에 있든지 어디 있든지 집 떠난 우리를 향해 내 가 기다리고 있다고 내가 찾고 있다고 컨펌 집으로 돌아오라고 우리를 향해 기다리 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성경은 설명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담이 그렇게 죄를 짓고 숨었던 장면을 여러분 기억하시지 않습니 까? 얼마나 수치스러웠던지 하나님 앞에 숨었습니다. 부끄러워 나갈 수가 없습니다. 숨은 아담을 향해 하나님 뭐라고 말씀합니까? 아담 아 내가 어디 있느냐? 에라 모유 하나님이 아담이 어디 있는지 모르셨을까요? 야 너 정말 잘 숨었다. 꼭꼭 숨어서 하나도 안 보인다. 진짜 못 찾겠다. 너 어디 있냐라는 질문이었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 알고 계셨습니다. 아담의 상태도, 아담의 수치도, 아담의 죄악도, 아담의 그 부끄러운 마음도 알고 계신 하나님 아담아 내가 어디 있느냐 그 질문은 아담의 위치를 찾고자 하는 질문이 아니라 그 아담을 향해 숨고 수치스러운 아담을 향해 내가 너를 찾고 있다고, 내가 너를 기다리고 있다고 내가 가 내게 돌아오기를 내가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아닙니까? 내가 어디 있느냐 돌아오라고 우리를 향해 찾으시고 기다리시는 아버지 오늘 성경은 우리에 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를 기다리신다고 두 번째로 이 아버지는 우리를 향해 달려 오시는 아버지입니다. 러닝 파 오늘 성경 말씀 보십시오. 뭐라고 말씀합니까? 아버지가 그를 보고 치근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버지가 돌아오는 아들을 보았다고 이야기합 니다. 먼저 보는 순간 아버지는 모든 것들을 다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는 아들을 향해 그냥 일직선으로 뛰어가기 시작합니다. 성경 말씀을 보면 이 아버지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을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습니 다. 아마도 이 아버지는 상당한 부자였던 것 같습니다. 잔치를 벌일 때 종들이 있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아니 살찐 송아지를 잡을 정도로 부유함이 있었습니다. 큰아들도 아버지의 밭에서 일하고 돌아왔던 사건을 기억합니다. 그 마을의 유지였을 것입니다. 잘 나가는 덕망 있는 분이었을 겁니다. 그 당시 문화에도 이런 사람들은 뛰지 않습니다. 발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가 아들을 보는 순간 체면도 집어던집니다. 체통도 집어던집니다. 사람들의 판단과 평가와 수군과 다 잊어버립니다. 그냥 아들을 향해서 일직선으로 그냥 뛰어가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십시오. 다른 것들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아들만 보입니다. 싶더나 돌아온 그 아들을 향해 그냥 달려가는 아버지 벗어 발로 뜁니다. 눈썹을 휘날리며 뜁니다. 달려가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십시오. 아들이 돌아오는 발걸음은 어땠을까요? 투벅투벅 부끄러움과 죄책감으로 인해 그 는 한 걸음 한 걸음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고 있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그 아들을 향해 뛰어가고 있는 아버지를 보십시오. 아들이 한 걸음 할 때 아버지는 열 걸음을 뛰고 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께 오는 거리보다 아버지가 아들을 향해 달려가는 거리가 훨씬 더 많 고 훨씬 더 빨리 달려가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십시오. 우리를 향해 달려오시는 이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저는 빌립보서 2장의 말씀을 생 각하게 합니다. 빌립보서 2장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본체 신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으로 사람들과 함 께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자기를 비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 지 아니하시고, 다른 성경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하늘의 모든 특권을 다 내어놓으시고 종의 모습으로 사람들과 함께 자기를 낮추시 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늘 저 곳에서부터 가장 연약 하고 가장 불행하고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수치였던 그 십자가의 죽음까지 이 직선 으로 그냥 그렇게 달려오셨던 예수 그리스도. 자기의 생명을 주기까지 하늘의 보좌도 특권도 그 어떤 것도 다 내어던지시고 그렇 게 십자가를 향해 달려오셨던 예수 그리스도, 오늘 그 아들을 향해 달려가는 아버 지의 모습.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번은 제가 인터넷에서 이 이야기를 접하면 서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미국의 초등학교 2학년 클래스에 있는 레틀이 이 자이라는 학생의 이야기입니다. 그 초등학교 2학년 선생님이 자네 어머니를 불러서 상담을 요청합니다. 영문을 알지 못한 어머니는 선생님을 만나게 되고, 선생님은 왜 엄마를 불렀는가를 설명해 주기 시작합니다. 지난주에 우리 반에서 제가 아이들한테 개미와 배짱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개미와 배짱이가 있는데, 개미는 가을 내내 다른 짓 하지 않고 여름 내내 추운 겨울 을 위하여 음식을 준비하고 보관했다. 그런데 배짱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계속 놀기만 했다. 이렇게 이야기를 끝내고 선생님이 숙제를 내줬다는 겁니다. 숙제는 이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아주 추운 겨울이 왔다. 그다음에 이야기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끝내오는 숙제를 내줬다는 겁니다. 그다음 주에 선생님이 아이들의 숙제를 다 거둬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두 그룹으로 나눠지기 시작합니다. 한 그룹은 개미는 자기가 모아놓은 음 식을 먹고 잘 겨울을 지내고, 배짱에는 음식이 없어 굶어 죽었다. 그런데 또 다른 그룹은 이렇게 섰답니다. 개미가 착해서 자기가 모아놓은 음식을 배짱이와 나눠 먹고 둘이 겨울을 행복하게 잘 지냈다. 그런데 이 레트 자니 이 쟈이란 학생은 선생님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답을 써왔다 는 겁니다. 이렇게 썼답니다. 개미가 자기가 모아놓은 음식을 다 배짱에게 나눠주고 개미는 굶 어 죽었다. 그리고 그 밑에 이렇게 십자가를 그려놨대요. 저도 그 대목에서 여러분처럼 웃었습 니다. 그 웃음의 의미는 이런 거죠. 말도 안 돼. 그런 바보 같은 개미가 어디 있어 그런 스 투피한 개미 그런 개미 존재하지 않아 말도 안 돼. 맞아요. 그런데 성경은 말씀하세요. 하나님의 본체시나 자기를 비워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종의 모습으로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 가에 죽으심이라. 아들을 향해 가장 달려오신 아버지. 그래서 아들 앞에 섰습니다. 아들은 그 아버지 앞에서 무릎을 꿇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아버지 저는 제가 잘못 이런 말을 하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아버지가 쓰자마자, 아니 아들이 무릎을 꿇고 아무런 입을 열어 얘기하기 전에 아 버지는 그냥 목을 얼싸안습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입을 맞춥니다. 헬라어 원어를 보면 입을 맞춘다는 것은 한 번 그 냥 입을 맞추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매니케스에서 계속 입을 맞추는 겁니다. 온몸에 그냥 입을 맞춥니다. 목을 얼싸안습니다. 아버지가 하는 첫 번째 말이죠. 아들에게 주는 그 첫 번째 말은 바로 목을 얼싸안고 입을 맞춥니다. 등을 돌리고 돌아선 아들을 향해 아버지는 그냥 목을 얼싸안습니다. 입을 맞춥니다. 아들은 이렇게 이야기할지 모릅니다. 아버지 과거에 제가 정말 아니요. 아버지는 그 입을 입을 맞추어 막습니다. 아버지 지금 제 모양이 이런 모습인데 아버지는 아들의 목을 얼싸고 입을 맞춥니다. 아버지 앞으로 제가 어떻게 아들은 그 아버지는 아들을 향해 목을 얼싸고 입을 맞 춥니다. 그 얼마나 추접하고 돼지를 치는 잡을 얻어서 더럽고 오물 가운데 있었던 아들을 향해 아랑곳하지 않고 목을 얼싸안고 입을 맞추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십시오. 있는 모습 그대로 어떤 상태에 있든지 그 아들을 향해 목을 얼싸안고 입을 맞추시 는 아버지, 오늘 그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향해 달려오시는 아버지십니다. 우리를 향해 기다리시는 아버지, 우리를 향해 달려오시는 아버지, 그리고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아버지를 성경은 설명합니다. 아들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아버지여 내가 아버지와 하늘 앞에 죄를 짓 고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자격 없습니다. 맞아요. 자격 없어요. 자격 없는 아들을 향해 조건 없이 주시는 아 버지의 사랑 아들은 이야기합니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쓰소서. 아니요 품꾼이 될 자격도 있었나요? 그것조차도 없었어요. 그런데 그런 아들을 향해 아버지는 종들을 향해 소리를 지릅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혀라. 손에 가락질을 끼워라.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찐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라고 이야기합니다. 좋은 옷을 가져오라고 이야기해요. 좋은 옷이 어디 준비되어져 있을까요? 어떤 옷 이 좋은 옷이었을까요? 아마 이 좋은 옷은 아버지의 옷이 아니었을까요? 돼지 치 는 것으로 헐거벗었던 그 아들을 향해 아버지의 가장 좋은 옷으로 그를 덮이시는 아버지를 보십시오. 온갖 상처로 엉망이 된 그의 발에 새로운 신발을 신겨주시고, 아들을 상징하는 가 락질을 끼워주시는 아버지 아니 내가 너를 용서하고 내가 너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살찐 송아지를 잡아 마을 사람들을 초청합니다. 그리고 온 공동체, 그 마을에서 그 아들을 아들로 인정하는 회복을 경험하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 아들이 죽었다가 살았고 잃었다가 얻었으 니 기뻐하는 것이 당연하지 아니하냐라고 이야기하며 내 아들이 내 아들이 이야기 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 아버지는 우리 향해 기다리시는 아버지입니다. 그 아버지는 우리를 향해 달려오시는 아버지입니다. 그 아버지는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회복시키시며 용서하시며 우리를 깨끗게 하시 고 우리를 다시 한 번 하나님 앞에 회복케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은혜 오늘 성경 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포퓰러 나무의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 있나요? 한 아버지가 그 아들에게 아들이 아 버지께 실수를 하고 잘못을 저질러 집을 떠나고 맙니다. 그런데 떠나있는 동안에 얼마나 힘들었던지 아버지의 집을 생각하며 아버지께 용 서를 구하고 돌아오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나를 용서할까? 자신이 서지 않습니다. 불안한 마음에 두근거립니다. 용기를 내어 편지를 씁니다. 아버지 내가 몇 날 며칠에 아버지 집에 가는데 그 아버지 집 앞을 지나가는 역전 앞에 있는 큰 포필러 나무에 아버지가 나를 용서 하신다면 신천을 걸어주시면 나를 용서하시는 줄 알고 내가 거기서 내려서 그다음 역에서 내려서 집으로 가겠지만, 신천이 없으면 용서 안 하시는 줄 알고 내리지 않 고 그냥 지나가겠다고 편지를 씁니다. 약속한 날짜에 아들은 기차를 타고 아버지 집으로 향합니다. 그런데 그 역전 앞에 포필로 나무가 있는 그 아버지 집 앞에 있는 역전으로 향하는 데, 과연 포필로 나무에 신천이 걸려 있을까 두근거리는 마음에 얼마나 불안한지 모릅니다. 아버지가 정말 나를 용서할까? 점점 가까울수록 그의 마음은 떨리고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어 그는 앞에 있는 사람에게 부탁을 합니다. 다음 역에 큰 포필로 나무가 하나 있는데 거기에 흰색 천이 걸려 있는지 제발 좀 봐 주시겠습니까? 그리고 아들은 눈을 질근 감아버립니다. 그 역을 지나가고 난 후에 아들은 눈을 떠서 앞에 있는 부탁한 사람에게 묻습니다. 그 나무에 흰색 천이 걸려 있던가요? 부탁을 받은 그 사람은 아니요라고 답합니다. 고개를 떨군 아들은 그럼 그렇지 아버지가 나를 용서할 수 없을 거야? 그때 그 사 람은 이야기합니다. 그 나무뿐만 아니라 역전 앞에 모든 나무에 흰색 천이 걸려 있던데요. 아버지는 혹시나 아들이 큰 포필로 나무에 걸려 있는 흰색천을 못 보고 지나갈까 봐 역적 앞에 있는 모든 나무에 흰색천을 걸어놓았던 것이죠. 오래전에 잃어버린 가족을 찾는 신문 광고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 광고의 내용 은 거의 이렇습니다. 그냥 오기만 해라. 다 잊어버렸다. 다 용서했다. 기다리고 있다. 그냥 돌아오기만 해라. 어떤 분은 이렇게 썼더라고요. 너 안 오면 나 죽는다. 저스컴 홈 그냥 오기만 해라. 기다리고 있다고 달려가고 있다고. 그리고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아버지 오늘 성경은 바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고백합니다. 내 아들이 죽었다가 살았고 잃었다가 찾았으니 그래 서 우리가 잘하는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에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찾았네. 아워 블라인 와이 아워 러스트 나우 앤 파운트 어메이징 그레이스 나 같은 죄인 살 리신 이 찬송을 지은 전 뉴튼이라는 그분은 영국의 지독한 노예 상인이었습니다. 그 지독한 노예 상인이 하나님의 은혜로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기독교 인이 되고 나중에는 목회자가 됩니다. 그의 일기에 마지막에 이렇게 썼습니다. 이제 내가 나이가 너무 들어서 기억이 가 물가물하다. 내 손주들의 이름조차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여전히 정확하고 확 실하게 나는 두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하나는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이라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크신 구세주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바로 우리를 향해 달려오시고 우리를 향해 회복시키시는 하나님 아 버지의 사랑. 이 뉴튼 목사님이 나이가 들어 설교할 때 그때는 이렇게 마이크도 없었어요. 큰 소리로 설교하기에는 연세가 너무 들어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으니까 젊은 목사 님이 옆에 서서 이 자 뉴튼 목사님이 하는 설교를 다시 반복해서 큰 소리로 청중에 게 전합니다. 전 뉴튼 목사님이 옆에 설교문을 가지고 읽습니다. 지저스 이스 프레셔스 예수님은 종교하십니다. 그랬더니 옆에 있는 키 큰 그 젊은 목사님이 큰 소리로 예수님은 종교하십니다. 저 뉴튼 목사님이 또 말합니다. 예수님은 종교하십니다. 이 목사님 이렇게 보니까 그 말은 한 번밖에 써있지가 않아요. 속으로 생각하기를 나이가 많이 드셔서 읽었던 것 또 읽었구나라고 생각이 들어 옆 으로 툭 치면서 이야기합니다. 목사님 그거 했는데요. 저 한 뉴튼 목사님이 이 젊은 목사님을 향해 다시 이야기합 니다. 선 애촉해 괜찮아 다시 한 번 이야기하세요. 예수 그리스도는 존귀하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그렇게 우리를 향해 찾아오시는 아버지, 이 세상에 어떤 죄도 어떤 상처도 어떤 상태도 우리를 향한 그 아버지의 은혜, 그 아버지의 사랑 앞에 가까이 할 수 없는 우리를 향해 기다리시는 아버지, 우리를 향 해 달려오시는 아버지, 우리를 향해 회복시키시는 아버지 오늘 이 아버지 집에 아 버지 집에 그 아버지와 함께 있는 여러분과 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 다. 우리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