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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호 목사 다니엘기도회 설교문 본문

다니엘기도회/목사 다니엘기도회 간증

김은호 목사 다니엘기도회 설교문

generalQS 2024. 2. 12.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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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다니엘 기도회가 찾아오게 되면 굉장히 흥분이 됩니다.

이 흥분은 영적인 흥분인데 그 이유는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을 생각하니 영적으로 흥분이 되고, 또 하나님께서 21일 동안의 다니엘 기도회를 통해서 어떤 일을 행하실까 하나님이 행하실 일에 대한 기대감 때문에 영적인 흥분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그런 사모함과 흥분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모하는 용어를 만족케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다니엘 기도회는 참여하는 수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동일한 말씀을 함께 받고 동일한 찬양을 함께 드리고 또 마음을 같이하여 함께 부르짖어 기도하는 연합기도회입니다.

근데 가끔 보게 되면 한 교회의 기도회 행사로 알고 있는 분들이 있어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다니엘 기도회는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이 땅에 교회와 성도들이 교단과 교파의 벽을 뛰어넘어서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고 함께 부르짖어 기도하는 연합기도회입니다.

다니엘 기도회의 영적 DNA는 연합입니다.

 

예전에 개척교회를 섬기는 한 성도님으로부터 이런 간증을 들은 적이 있어요.

자신이 다니는 교회는 지하 교회인데 항상 20명 정도의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예배를 드릴 때마다 늘 외롭고 쓸쓸한 생각이 들었다고 해요.

그런데 다니엘 기도회에 참여해서 지금 내가 부르는 이 찬양을 우리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저 제주도에 있는 백령도에 있는 저 목포와 창원, 대전, 대구, 부산, 정말 각 지역에 있는 수많은 성도들이 내가 부르는 이 찬양을 함께 부르고 있다는 이 사실, 함께 선포되는 말씀을 받고 아멘으로 화답하고 동일한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함께 기도할 수 있다는 이 사실 때문에 외롭다는 생각이 사라지고, 그리고 예배의 감격이 회복이 되었다라고 하는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성령님은 하나 되게 하시는 영이십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했고, 우리 예수님도 요한복음 17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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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님의 간절한 바램이 뭘까요? 그것은 정말 이 땅의 교회와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근본 다니엘 기도에 참여하는 우리 모두가 교단과 교파의 벽을 뛰어넘어서 또 지역의 벽과 세대와 이념의 벽을 뛰어넘어서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우리가 성령 안에서 하나 돼서 함께 기도할 때에 우리는 이 다니엘 기도를 위하여 쌓아두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들 중에는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기도를 하지 않아서 시험에 드는 사람도 있지만 역설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기도를 많이 했기 때문에 시험에 드는 사람도 있어요.

왜냐하면 새벽 기도도 빠지지 않고 하지

 

금요 기도회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해서 열심히 기도합니다.

그리고 다니엘 기도에도 21일 동안 열심히 참여해서 부르짖어 기도했어요.

그런데 자기가 원하는 기도에 응답을 받지 못하는 거야.

아니 응답은커녕 문제가 더 심각해지는 거야. 여러분 이쯤 되면은요.

많은 분들이 기도 때문에 시험에 들고 실족하게 됩니다.

그래서 급기야는 하나님 정말 살아계십니까? 정말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으셨어요? 하나님 날 사랑하세요? 아니 어떤 분은 하나님 입장을 좀 바꿔놓고 생각해 보세요라고 따지기도 하죠.

어떤 분은요 저 내일부터 새벽 기도 안 나옵니다. 앞으로 제 인생에 새벽 기도는 없어요 라며 협박을 하는 분도 있죠.

그러나 여러분 엄밀하게 말하면 기도 응답에는요.

4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가 뭐냐 하면 즉시 응답하실 때가 있어요.

여러분도 아마 경험하신 분이 계시겠지만 내가 지금 방금 기도했는데 몇 시간 안에 아니 그날에 하나님이 즉시로 응답하실 때가 있어요.

 

성경에 보게 되면 혈루병 여인도 즉시로 고침을 받았잖아요.

죽은 나사라도 며칠 후에가 아니라 그날 그 현장에서 살아났잖아요.

나면서부터 안지명이 된 자도 그날 그 현장에서 일어나 걸었잖아요.

제가 35년 목회를 했는데 35년 목회 가운데도 보게 되면 하나님이 즉시로 응답할 때도 있었어요.

생각해 보게 되면 제가 예전에 장기 금식을 하고 보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금식을 하게 되면 금식할 때보다 보식할 때가 더 어렵다는 거 아시죠? 보식을 하고 있는데 그 당시에는 이제 신문이 집으로 전달이 됐잖아요.

배달이 되는데 그 배달된 신문에 광고 전단지가 하나 들어왔어요.

근데 그게 뭐냐 그러면 영광 굴비 이 영광 굴비에 대한 광고 전단지가 들어왔는데 얼마나 먹음직스럽게 보이는지 몰라.

그리고 그게 또 이렇게 연분홍색 보자기로 쌓여 있었어요.

그리고 신청 전화번호까지 있었는데

 

제가 너무 먹고 싶어서요. 그래서 그 전화번호를 제가 외우려고 했어요.

그리고 나중에 신청을 하려고 주님 먹고 싶어요. 그런데 여러분 아마 1시간도 안 지났을 거예요.

누가 우리 집 배를 눌러서 나갔더니 지금도 우리 교회를 다니신 집사님이신데 그분이요.

제가 신문에서 보았던 그 영광 굴비를 가져오신 거예요.

저는 굴비 때문에 놀란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내 마음속으로 드렸던 그 기도를 이렇게 빨리 즉각적으로 응답하신다는 사실이 너무 놀랐던 거예요.

지금도 그 집사님 보게 되면 그때가 생각이 납니다.

5만 번 기도에 응답을 받은 조지 밀러는요. 이런 말을 한 적 있어요.

우리 한번 같이 읽어볼까요? 다 같이요. 나는 54년 9개월 동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로 살면서 기도한 그 시간 혹은 기도한 그날에 응답받은 적이 3천 번이 넘는다.

여러분 그날 그 시간에 응답을 받은 적이 3천 번이 넘는데요.

예를 들면 뭐 여러분도 다 아시는 얘기지만 어느 날 아침에

 

그 고아원을 하고 있었잖아요. 그 고아원 아이들에게 아침 식사를 제공을 해야 되는데 양식이 떨어진 거예요.

굶길 수는 없잖아요. 300명의 고아들을 식탁에 앉혀놓고 일단 간절하게 식사의 기도를 했습니다.

근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기도가 끝나자마자 런던의 유명 제과점에서 전화가 걸려왔어요.

어젯밤에 빵을 굽다가 실수로 조금 타서 팔기는 어렵지만 먹기에는 지장이 없으니 원하시면 지금 당장 보내주겠다는 그런 내용이었어.

또 조지 밀러가 이제 빵을 식탁에 놓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나자 누군가가 고아원의 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거예요.

그랬더니 나가 보니까 어떤 분이냐 그러면 이 우유를 배달하시는 분인데 하필이면 그 시간에 우유를 배달하는 차가 고아원 앞에서 문제가 생긴 거예요.

시궁창에 빠져서 가지를 못하는 거예요. 직원들 몇 명이 나가서 도와줬는데 그 대가로 큰 우유 한 통을 줘서 그날 아침에

 

빵과 우유를 아이들에게 먹일 수 있었다라고 하는 거죠.

이렇게 그날 즉시로 하나님이 응답하실 때도 있습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기도에 즉시 응답해 주시지는 않아요.

여러분 기도하면 즉시 응답해 주는 경우는 정말 많지 않아요.

때로는요 몇 주가 걸리고 때로는 몇 달이 걸리기도 하고 때로는 몇 년을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심지어는요. 여러분이 이 세상을 떠나고 난 이후에 여러분이 죽고 난 이후에 응답이 되는 경우도 있어요.

여러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경우도 마찬가지 아니에요.

75세에 부르심을 받았잖아요.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큰 민족을 이루리라고 하는 약속을 받았단 말이에요.

이건 자녀를 주시겠다는 말씀이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25년이 지난 100세에 하나님은 아들 이삭을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많은 경우에 하나님은요. 우리가 기도하면 때를 기다리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세 번째로는 다음으로 응답하실 때가 있어요.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 당신의 생각이 다를 때에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것으로 응답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원하시는 것으로 응답을 하십니다.

여러분 그럴 때가 참 많죠. 여러분은 이렇게 기도했는데 응답은 내가 생각했던 거와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응답이 이루어질 때가 있어요.

저도 이제 교회를 개척해서 길동에서 있었잖아요.

저희 교회가 처음에 그래서 이제 길동 상가에서 교회를 옮기려고 하는데 그때 나름대로 이제 현장도 보면서 하나님 여기가 1번입니다.

그때 구의동에 있는 상가가 1번이었어요. 2번은 풍납동에 있는 상가였어요.

3번이 어디냐 올림픽 아파트에 있는 지 상가였어요.

제가 제일 원했던 건 뭐예요? 1번이었어요. 그다음은 2번 3번은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요. 제가 원했던 1번이 아니라 3번으로 응답하셨어요.

그래서 올림픽 아파트 지상가로 저희가 옮기게 됐잖아요.

생각해 보니까 그때 구이동으로 안 간 게 너무 잘했더라고요.

 

3번이 하나님이 정한 게 너무 맞았어요. 여러분 우리가 원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게 아니야.

하나님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응답을 하십니다. 네 번째로는요.

응답하지 않으실 때가 또 있어요.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노라고 거절하실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그럴 때 참 많죠.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은 육체의 가시가 제거되도록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내 은혜가 내 은혜가 내게 조카다라고 거절하셨어요.

또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모세가 요단강을 건너가기를 위해서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거절하셨어요. 같이 읽어볼까요? 다 같이요.

그만해도 조카니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그만해도 조카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여지없이 거절하셨어요.

오늘 또 하나님은요. 내 영혼에 유익되지 않는 것을 구한다든지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것을 구하면

 

결코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엄밀하게 말하면 이 노라고 하는 응답도 기도의 응답 중에 하나입니다.

여러분 아주 어린 아이가 아빠에게 여러분 면도칼을 달라고 하면 그 손에 쥐어줄 부모가 있어요.

아니죠 그러니까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노라고 하는 거절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응답 중에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도 바울과 지도자인 모세는요.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에 노라고 거절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시험에 들거나 실족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노라고 하는 하나님의 기도에 응답을 하나님이 주시는 응답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요 네 가지 방식으로 우리의 기도에 응답을 하십니다.

하지만 성도들 가운데는 기도의 응답이 더디거나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응답이 되지 않으면 여전히 기도로 인하여 실종하고 시험에 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로 인하여 실족하고 시험에 들 것이 아니라 그런 분들은 기도로 인하여 실족하고 시험에 들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기도하고 있는지 내 자신의 기도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일 기도회 첫날인 오늘은 기도로 인하여 내가 시험에 들거나 실족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응답의 확신을 가지고 믿음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기도하라고요? 응답에 확신을 가지고 믿음으로 기도하라 23절의 말씀인데요.

함께 읽겠습니다. 다 같이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도로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예수님은 이 산도로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로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된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당시 유대사회에서의 산은 뭐냐 심히 어려운 일이나 또 불가능한 일을 가리킬 때에

 

산을 산으로 표현을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그렇잖아요.

우리도 어떤 문제를 만나면 그 문제를 가리킬 때에 태산과 같다 라고 표현할 때가 있잖아요.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우리 앞에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문제가 있을지라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음으로 외치고 선포하고 나아가면 그 불가능이 가능해진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은 곧바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4절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다 같이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기도할 때 막연하게 기도하지 말고 응답을 확신하면서 믿음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미 하나님께서 내 기도에 응답해 주신 줄 믿고 받은 줄로 믿고 의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야고보 기자도 야고보서 1장 6절과 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어요.

다 같이요.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그런데 여러분은 기도하면서 정말 응답을 확신하면서 믿음으로 기도하고 있습니까? 벌써 아미를 잘 못하잖아요.

다시 한 번요. 정말 여러분 우리가 기도하기 위해서 모였는데 내가 기도할 때에 응답을 확신하면서 믿음으로 기도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기도는 하면서도 두 마음을 품고 있다는 거예요.

기도는 하면서도 응답에 확신이 별로 없다는 거예요.

그러나 여러분 기도는 주문이 아닙니다. 기도는 확률이 아닙니다.

기도는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구하는 것이 뭐예요? 이게 바로 기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관계를 확신하는 자,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시고 나는 그분의 자녀라고 하는 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확신하는 자,

 

그리고 내 아버지는 선하시기 때문에 내게 가장 좋은 것으로 내 영혼의 가장 유익한 것으로 가장 선한 것으로 응답하신다는 이 확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간절한 기도가 하나님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움직이는 것은 우리의 피로가 아니에요.

우리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움직이는 것은 중원부원의 기도가 아니라 우리의 믿음입니다.

기도할 때에 응답받은 줄로 믿는 이 믿음이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인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께 억지를 부리고 막 떼를 쓰고 졸라대서 응답을 받으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생각하고,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시고, 나는 그분의 자녀라고 하는 이 관계 속에서 여러분 확신을 가지고 믿음으로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 누가 응답을 확신하며 기도합니까? 누가 응답을 확신하며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나요? 첫째로

 

하나님을 믿는 자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예수님은 응답을 확신하며 기도하라고 말씀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신지 아세요? 하나님을 믿으라고 그랬어요.

22절 하반절이죠. 다 같이 하나님을 믿으라. 따라서 합시다.

하나님을 믿으라. 그러면 언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잎사귀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그 무화가나무를 저주하시고 난 이후입니다.

다음 날 아침 제자들이 그 저주를 받은 무화과 나무가 뿌리채 말라 있는 것을 보게 됐어요.

그러자 베드로가 어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 나무가 말랐나이다. 지금 베드로는요.

왜 열매가 없는 이 무화과 나무가 말랐는지 그 이유를 예수님께 묻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 이유에 대하여 말씀하지 않으시고 아주 쌩뚱 맞게 사오정처럼 하나님을 믿으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어요.

 

무슨 말이죠? 당시에 이스라엘이 잎사귀만 무성하고 열매를 맺지 못했던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그들은 열심히 성전을 찾았어요. 그곳에서 제사를 드리고 있었어요.

한례도 행하고 각종 절기를 지키면서 율법을 지켜 행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않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에 관하여서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과의 친밀함도 없었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열매가 없었던 거죠. 그래서 예수님은요.

22절과 23절과 24절에서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질 때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 함께 읽겠습니다. 다 같이요.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정말 하나님을 믿는 자는 아무리 내 앞에 산과 같은 문제가 있을지라도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일지라도 당당히 믿음으로 선포하고 외치며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믿는 자는 응답을 확신하며 믿음으로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들으시고 응답하시면 그대로 되리라고 하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기도는요. 기도의 내용보다 기도의 대상이 더 중요합니다.

제가 늘 말씀드렸잖아요. 기도는 기도의 내용보다 내가 누구에게 기도하느냐 기도의 대상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기도의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서 기도의 내용이 달라질 수밖에 없고, 그리고 응답에 대한 확신도 달라지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세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십니다.

이 우주만물을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있는 것도 없게 하시고

 

없는 것도 있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십자가에서 마귀의 일을 멸하시고 승리하신 분이십니다.

죽은 자도 살리신 분이시고, 각종 병든 자도 고치신 분이시고, 풍랑도 잔잔하게 하신 분이십니다.

두 번째로 누가 응답을 확신하며 믿음으로 기도하죠.

첫 번째는 하나님을 믿는 자고 두 번째로는 그 말씀이 있는 자입니다.

시편 56편을 보게 되면 다윗은 위급한 상황 속에서 이런 놀라운 고백을 하게 되죠.

읽겠습니다. 다 같이요.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다.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님을 의지하겠다라고 고백하죠.

그러면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게 뭐예요? 4절과 10절의 말씀을 읽겠어요 다 같이요.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다.

여기 보게 되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뭐라고 말하죠? 그 말씀 그의 말씀을 찬송하는 것이라고 말해요.

왜냐하면

 

그 말씀을 신뢰하고 그 말씀을 의지하는 자만이 그 말씀을 찬송할 수가 있기 때문이죠.

그러면 그 말씀이란 무엇을 말하느냐는 거예요.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그 말씀은 뭘 말하죠?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입니까? 물론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죠.

그렇지만 여기서 말하는 그 말씀은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주신 특별한 말씀을 말합니다.

당시 다윗에게는요. 내가 너를 떠나지도 않고 내가 너를 버리지도 않고 내가 반드시 너와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고 하는 이 약속의 말씀이 그때 그 상황 속에 있는 다윗에게는 바로 그 말씀이었어요.

그 말씀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 말씀을 찬송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에게는요. 그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다니엘 기도에 참여하는 모든 성도님들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그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가서 그 말씀을 가지고

 

담대하게 선포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주장할 수 있는 부르짖어 기도할 수 있는 그 말씀이 반드시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거나 역사를 보게 되면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바 되어서 쓰임을 받았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하나님께서 주신 그 말씀으로 고난을 이겨내고 하나님이 주신 그 말씀으로 어둠을 물리치고 하나님이 주신 그 말씀으로 영적 전쟁에서 승리를 하였습니다.

아프리카 선교사였던 리빙스턴 역시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리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여러분 이 약속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에 온갖 두려움을 이겨내고 찬송하며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었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우리가 잘하는 기도의 사람 조지 밀러 역시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이시며 시편 68편 5절의 말씀이 마음에 와닿았어요.

하나님은 고의 아버지 그러면 내가 고아원을 만들어서

 

육신의 아버지, 육신의 부모가 없는 자들에게 하나님만이 진정한 너희들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을 가르쳐줘야 되겠구나 그래서 고아원 사역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아이가 없어서 성전에서 간절히 기도하던 한나도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내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길 원하노라 누구의 말이죠? 엘리 제사장의 말이에요.

그 엘리 제사장이 한나에게 해주었던 말인데 이 말을 하나님이 내게 주신 그 말씀으로 받았어요.

그래서 이제 이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고 그리고 마침내 사무엘이라는 아들을 낳게 된 것입니다.

오늘 단일 기도회에 참석하는 우리에게 반드시 반드시 뭐가 있어야 될까요? 그 말씀이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세운 강사들을 통해서 시간 시간 여러분들에게 필요한 그 말씀을 선포할 겁니다.

그때 여러분들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통해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그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붙들고 은혜의 보좌 앞에 당당히 나가서 그 말씀을 선포하고 그 말씀을 의지하여 부르짖어 믿음으로 기도해야 됩니다.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자, 그리고 그 말씀을 가지고 있는 자가 응답을 확신하며 여러분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는 것이죠.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되는가 크게 두 번째로 용서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용서하며 기도해야 돼요. 참 이 용서의 메시지는 전하는 자도 전하는 저도 부담스럽고 말씀을 받는 여러분도 상당히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23절과 24절에서 믿음으로 기도하라 그리하면 그대로 되리라 이렇게 말씀하셨잖아요.

그런데 이 말씀을 하신 다음에 권지어서 무슨 말씀을 하신 지 아세요? 용서의 말씀을 하셨다는 거예요.

25절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예수님은 믿음의 기도를 말씀하신 다음에 갑자기 용서에 대하여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을 보게 되면 기도와 용서는요 뗄래야 뗄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는 것입니다.

이 기도와 용서는요 여러분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왜 우리 주님을 믿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믿음의 기도를 말씀하시고 난 다음에 곤지어서 우리에게 참 부담스러운 그 용서에 관한 말씀을 하셨을까요? 여러분 용서하지 못한 것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역사하지 못하기 때문입.

아무리 기도해도 용서하지 못한 채 기도하면 결코 우리의 기도가 응답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용서하지 못함이 우리의 기도를 묻고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주님은 마태복음 5장 24절에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함께 있겠습니다. 다 같이요. 예물을 재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이 말씀을 보게 되면 예배가 먼저입니까? 아니면 용서가 먼저입니까? 용서가 먼저요.

 

기도가 먼저가 아니라 여러분 용서가 먼저입니다.

화목이 먼저예요. 여러분 용서치 못하는 것은요.

결국은 내 영혼을 병들게 하고 용서치 못함이 나로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용서치 못하고서는 우리가 주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서 기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게 되면 예수님은 늘 기도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난 다음에 용서에 대하여 자주 말씀을 하셨습니다.

기도와 용서에 대해서 주님은 연결하여 말씀을 하셨어요.

마태복음 18장 18절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다 같이요.

진실로 너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오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나님의 교회인 우리가 이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고 우리가 이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메인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요 교회인 우리에게 묻고 푸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영적인 전쟁을 잘하려면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가지고 이 묶고 푸는 것을 잘 해야 됩니다.

 

이렇게 묻고 푸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신 예수님은요.

곧바로 용서에 관하여 말씀을 하십니다. 마태복음 18장 21절과 22절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다 같이요. 그때에 베드로가 나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이 말씀은 용서에는 뭐예요? 끝이 없다는 거예요.

우리 우리 인간의 한계는 우리 인간의 용서의 한계는 7번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3 세번입니다. 여러분 7번도 대단한 거 아니에요.

그러나 우리를 향한 주님의 용서는 끝이 없습니다.

몇 번 용서해 주고 끝나는 용서가 아닙니다. 무한대의 용서입니다.

저 역시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연약하여 넘어졌을지라도 또다시 주님 앞에 용서를 구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에 관하여 말씀하신 다음에 꼭 용서에 관하여 말씀을 하셨을까요?

 

다시 한 번 복습하는 의미에서 말씀드리면 기도의 응답과 용서는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기도의 응답과 용서는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어요. 그러므로 형제와 불화하면서 가족과 등지고 살면서 미움의 쓴뿌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기도의 응답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믿싸웠고 믿습니다라고 쌍셔스를 해도 소용이 없어요.

그러므로 여러분 힘들어도 용서를 먼저 하셔야 됩니다.

그런데 용서한다는 것은요 말은 쉽죠 실제로 어렵습니다.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이렇게 말해요.

목사님 용서해야 된다는 거 저 알아요. 그런데 입으로는 용서를 말하지만 마음으로는 용서가 안 되는데 어떡합니까? 이렇게 말하는 분들이 정말 많습니다.

여러분 내 마음에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용서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근데 왜 우리가 용서하죠? 주님께서 우리에게 용서를 하라고 명하셨기 때문이죠.

여러분 아침에요

 

잠이 없어서 일찍 일어나서 학교에 가는 자녀는 별로 없습니다.

학교에 일어나서 가야 된다는 당위성 때문에 또 출근을 해야 된다는 당위성 때문에 여러분 우리가 일어나는 거잖아요.

마찬가지예요. 우리 안에 용서의 마음이 들 때까지 기다리면 아마 죽을 때까지도 그 사람은 용서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용서를 명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라도 먼저 용서를 하는 겁니다.

먼저 용서를 하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고 정말 나중에는 용서하고자 원하는 마음을 주시는 것이죠.

여러분 왜 이렇게 용서가 힘들고 어려울까요? 용서는 타락한 인간의 성품이 아니기 때문입 타락한 우리 인간의 성품은요.

미워하고 시기하고 복수하고 분을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용서는요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의 용서를 받아들이고 경험해본 사람만이 결국에는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골로새서 3장 1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 같이요.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주님이 너희를 용서하신 것처럼 너희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말입니까? 주님의 용서를 경험했다면 다른 사람을 용서해 줄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를 믿음으로 받은 가장 큰 축복이 뭐죠? 용서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완전합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다시 기억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끝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용서를 여러분 정말 경험해 보셨나요? 지금 여러분은 이런 하나님의 용서의 축복을 누리며 살고 계십니까? 오늘 이 용서의 축복을 누리며 사는 자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다른 사람을 용서하며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제일 큰 능력이 뭔지 아세요? 용서의 능력입니다.

 

여러분의 최고의 간증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최고의 간증입니다. 금번 다녀 기도의 간증의 주인공이 되라고 그랬는데 바로 여러분 이 간증을 하셔야 돼요.

내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내가 용서했다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내가 사랑하게 되었노라고 이것이 이번 단녀 기도의 최고의 간증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용서하기를 기뻐하십니다. 왜요? 용서는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내가 용서를 하면 용서를 하는 만큼 우리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멀어질 수밖에 없어요.

여러분 우리가 용서를 하고 또 용서를 받을 때에 주님을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용서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인생의 기회를 허락하여 주십니다.

요셉은 형들을 요셉도 보세요. 형들을 용서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이대한 일들을 경험할 수 있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됩니까? 용서하며 기도해야 됩니다.

용서하며 기도할 때에 여러분 묶인 것들이 풀어지고 우리의 기도는 응답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기도해도 기도의 응답이 없다면 내 자신을 한번 점검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되는가? 마지막 세 번째는 문제를 구하지 말고 해답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기도 하죠. 다시 한 번 따라서 하겠습니다.

문제를 구하지 말고 해답을 구하라. 스가랴 4장 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다 같이요. 큰 산아 내가 무엇이냐 내가 스루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언제 하나님이 이 말씀을 주시는가 하면요.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70년의 포로생활을 마치고 이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왔을 때 그들이 가장 먼저 하고자 했던 게 뭐냐 그러면 성전을 재건하고자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전을 재건하는 일은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전 재건 공사가 시작되었다가 그만 이제

 

중단이 되었어요. 그리고 16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바로 큰 사나 내가 무엇이냐 수르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큰 사는 뭘까요? 큰 사는 그 당시에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에 큰 사는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는 일을 방해하는 모든 대적과 장애물, 성전을 건축할 수 없는 모든 환경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앞에 있는 큰 산은 뭘까요?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입니다.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지금 내 앞에 있는 큰 산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내 인생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그 어떤 사람 여러분 그 사람이 내 인생의 큰 산이 될 수도 있어요.

나를 미워하고 비난하고 핍박하는 사람 그 사람이 내 인생의 큰 산일 수도 있어요.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이 경제적인 어려움, 현대의학으로 인간의 의술로도 고침을 받을 수 없는 질병,

 

오랜 결혼 생활에도 아이가 없는 것, 그리고 남편의 외도, 시부모의 핍박, 자녀의 가출 끊어지지 않는 중독과 습관, 그러니까 큰사는 내 힘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앞에 얼마나 큰 산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지금 우리에게는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문제들이 산적해 있어요.

여러분 그러지 않아요. 문제 없는 사람은 여기 오지도 않아요.

사실은 다 우리에게는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문제들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주님은 그 큰 산 앞에서 기죽지 말고 모든 것이 끝난 것인 양 포기하지 말고 큰산아 내가 무엇이냐라고 당당하게 외치고 도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큰 산이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어떤 산도 문제가 안 된다는 거예요.

우리에게는 그 문제가 산처럼 크게 보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때가 많아요. 내 남편만큼은 워낙 완고해서 안 될걸.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남편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거야.

아니 내가 이번 문제만큼은 안 돼. 기도하러 나왔으면서도 이미 이번 문제는 너무 커서 안 돼.

스스로 그렇게 결단을 내리고 있어요.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능치 못하실 일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이성과 경험으로 성령의 역사를 제안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은 광야의 길을 내시고 사막의 강을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홍해를 육지 같이 가르신 분이십니다. 죽은 나사로도 살리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큰 산,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나면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숨으려고 합니다.

아니 그 문제로부터 도피하려고 합니다. 아니 어떤 사람은 쉽게 포기해버리려고 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나 하나 없어지면 되지라며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요. 큰 산을 만났을 때에 여러분 도전합니다.

성경을 보세요. 대부분의 하나님의 사람들은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났을 때 어떻게 했나요? 피하였습니까? 숨었습니까? 아니죠.

도전했습니다. 여러분 다윗도 보세요.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향하여 도전하지 않았습니까? 예 여러분 갈렛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의 나이 85세에 이 산지를 달라며 여러분 도전했습니다.

엘리야도 마찬가지죠. 바의 선지자 850명과의 싸움에 도전했고 기도의 응답에 도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의 문제가 크다고 낙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문제가 크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누릴 수 있는 영적인 희열이 크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낙심하지 마세요. 뒷동산에 올라간 사람이 태극기를 꺾고 대한민국 만세 하는 사람 봤어요.

뒷동산에 올라가서 태극기 꽂아놓고 대한민국을 부르는 사람은 여러분 없어요.

그렇죠 적어도

 

여러분 2천 미터 이상 고지를 정복한 사람이 거기에 태극기를 꽂아놓고 대한민국을 부르는 거 아니에요 2천 미터 고지를 정복한 사람에게 뭐가 있겠어요? 영적인 히얼이 있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앞에 있는 산이 크면 클수록 문제가 크면 클수록 우리가 편지에서 누릴 수 있는 기쁨과 감격이 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넘을 수 없고 정복할 수 없는 그 큰 산 앞에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포기하지 말고 좌절하지 말고 이렇게 외치라는 거죠.

큰 산아 내가 무엇이냐? 수르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큰 산 앞에서 여러분 앞에 있는 그 문제 앞에서 더 이상 좌절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외치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하시지만 우리 인간의 편에서는 뭘 해야 된다는 거예요? 믿음으로 외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은요 믿음으로 외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소원과 내 야망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그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여러분 믿음으로 외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외쳐야 되죠? 본문을 보게 되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수르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어떻게 외치라고 말하죠? 수르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큰 산이 평지가 될 것을 외치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하여 믿음으로 외치면 우리 앞에 있는 큰 산이 평지가 된다는 것입니까? 무슨 말입니까? 넘을 수 없는 산도 넘을 수 있게 되는 것이고, 정복할 수 없는 산도 정복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불가능한 일들이 가능케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어떤 고난도 이겨낼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근데 여러분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그러면 우리가 믿음으로 외치되 문제를 외치지 말고 해답을 외치라는 것입니다.

큰사나 내가 무엇이냐 그렇게만 외치지 말라는 거예요.

 

큰 사나이가 무엇이냐라고만 외치지 말고 수르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고 외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문제를 외치는 것은요. 누구나 할 수 있어요.

여러분 그러지 않아요 문제를 외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어요.

배가 아파요. 난 외로워요. 난 아이를 갖고 싶어요.

나 결혼하고 싶어요. 내 남편 구원해 주세요. 고쳐주세요.

여러분 이것은 누구나 할 수 있어요. 그러나 큰 사나 수르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여러분 이 외침은요. 아무나 할 수가 없습니다. 믿음이 있는 자만이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산이 아무리 크고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큰 산아 내가 무엇이냐 니가 수르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고 당당하게 외쳐야 됩니다.

큰 사나 여러분의 이름을 넣어서 큰산아 김은호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여러분 이름 다 아시죠? 이름이 두 글자도 있고 네 글자도 있지만 적당하게 알아서 하세요.

다 같이 시작 큰산아 김은호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또 여러분이 기도하고 있는 그 사람 있죠 자녀일 수도 있고 선교사님도 있어요.

그 사람의 이름을 불러가면서 이번에는 다시 한 번 다 같이 시작 큰산아 김바울 앞에서 평지가 내리라.

예 이번에는 여러분의 교회 이름을 넣으면 됩니다.

교회 이름 두자일 수도 있고 교회 이름이 길면 좀 복잡해요.

이럴 때 큰 사나 다 같이 여러분 이제 교회 이름을 넣는 겁니다.

시작 큰 사나 어림교회 앞에서 편지가 되리라. 아멘 여러분 이렇게 우리가 문제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해답을 믿음으로 외치며 선포하며 나아가면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그러면 우리 앞에 있는 큰 산이 평지가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수룻바벨이 머릿돌을 내놓을 때에 모든 백성들이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라고 외치라고 했어요.

7절 하반절의 말씀입니다. 다 같이 그가 머릿돌을 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여기서 머릿돌은 주춧돌을 말하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을 믿고

 

첫돌을 놓기만 하면 다음부터는 하나님께서 은총으로 역사해 주시겠다는 말씀이잖아요.

하나님의 은혜로 큰 산이 평지가 되어도 성전 건축이 완성될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르바벨은요. 이는 힘으로도 되지 아니하고 그리고 능력으로도 되지 아니하고 오직 성령으로 된다는 말씀을 들은 다음에 곧바로 성전 공사를 재개를 했습니다.

어떻게 됐을까요? 에스라 6장을 보게 되면 성전 공사를 재개한 지 약 4년 만인 다리오 왕 제6년 빚이 516년 12월 3일에 성전이 준공이 되었습니다.

불과 4년 만에 큰 산이 평지가 된 것입니다. 꿈만 같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그 상상할 수 없는 일이 현실이 된 것입니다.

성전 건축을 방해하던 서편 총독이요. 이제 유다 백성들이 다시 성전 재건을 시작하자 이 페르시아의 왕 다리오 왕에게 상소를 올렸습니다.

서편 총독이 왜 상소를 올렸느냐 성전 건축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위해서

 

중단시키도록 하기 위해서 상소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그 상소를 받은 다리오 왕은 고레스 왕의 칙령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 고레스 왕의 칙령을 본 다리오 왕은 이런 명령을 내립니다.

성전 건축 공사를 다시 시작하라. 중단된 성전 건축 공사를 다시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성전 재건을 막기 위해서 상소를 올렸던 이 서편 총독에게 성전 재건을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경비와 물품을 지원해 주도록 하라.

여러분 이런 명령을 내렸습니다. 역전의 은총이 임한 것입니다.

성전 건축을 하지 못하도록 바리오 왕에게 상소를 올렸는데 도리어 이제는 자신이 성전 건축을 지원하고 성전 건축에 필요한 모든 물자를 공급해 줘야 되는 자로 바뀌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일하시면 이런 놀라운 역전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음으로 외치고 문제를 구하지 않고 해답을 구하여 나가면 성령님이 역사하시면 반드시 여러분 이런 역전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할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큰 사나 수르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은총은 그에게 있을지다라고 외치며 나갈 때에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문제를 만났다고 해서 포기하지 마십시오.

불평하지 마십시오. 내가 만난 문제가 이해가 안 된다고 해서 또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여러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마십시오.

주의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큰 산이 평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함께하시니 장애물이 변하여 디딤돌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문제를 구하지 말고 해답을 구하여야 합니다.

여러분 남편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우리는 자꾸 문제를 나열할 때가 많아요.

하나님 제 남편 술 좀 끊게 해주세요. 어제도 못 갔습니다.

요즘엔 주 하나 먹고 있습니다. 갈수록 강팍해지고 있습니다.

예수 믿을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런 기도를 하는 분들이 많이 계세요.

그런데 이것은 우리의 문제를 나열하는 기도입니다.

 

그런 기도보다는 여러분 우리는 해답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렇지만 성령님이 역사하시면 하나님 우리 남편이 저보다 더 믿음 좋은 사람으로 거듭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이 만난 예수를 간증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 힘 없는 교회에서 주차위원으로 섬겨야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좀 해답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만일 우리 문제만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마귀에게 역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될 때가 많아요.

우리가 문제만을 위해서 기도하게 되면 우리가 마귀에게 더 역사할 수 있도록 많은 정보를 주게 됩니다.

마귀가 역사할 수 있도록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이 되는 거죠.

그러므로 여러분 문제가 아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사람은 문제를 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해답을 구하는 자입니다.

 

근본 단열 기도회 기관에 우리 문제를 구하지 말고 해답을 구해서 정말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경험하는 우리 앞에는 큰 산이 평지가 되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는 다니엘 기도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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